조선일보 2014년 5월 30일

 

10여년 전 IT(정보기술) 기업들의 온라인 은행, 신용카드, 전자화폐 및 결제 등 금융산업 진출 바람이 불었다. 금융에서 IT의 활용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사업 기회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IT와 타 산업의 융합이 확산되고 있지만, 두 산업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느라 협력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중 상당 부분은 IT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해서 생기는 일이다.

융합 관점에서 IT의 역할을 평가하는 데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IT가 해당 산업 제품의 품질 개선이나 효율 향상에 기여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존 제품보다 품질은 떨어지지만 가격·편의성을 내세워 기존 제품을 대체하는 데 기여하는지다. 저명한 경영학자 크리스텐슨의 설명에 따르면 전자는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 후자는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해당된다. 존속적 혁신의 영역은 기존 기업이 잘해오던 분야고, 또 우량 고객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한다. 따라서 이들은 필요한 IT를 받아들여서 자신의 역량으로 내재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파괴적 혁신의 경우에는, 새로운 기업이 값싼 제품을 출시해 기존 기업이 방치한 로엔드(low-end) 고객이나 새로운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
둘째 기준은 IT가 타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이다. 즉, IT가 해당 산업의 핵심영역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니면 유통채널 등 일부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는지다. 전자의 경우라면 IT 활용을 잘하는 기업이 기존 기업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IT 기업의 역할은 기존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것에 그친다.

이런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최근의 IT 융합 사례들을 살펴보자. 먼저 금융산업을 보면 IT의 활용은 전형적인 존속적 혁신이다. 금융거래의 편의성을 높이고 비용 효율화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금융산업에서 IT의 역할이 아무리 커지더라도 자금조달 및 공급 등 본질적인 영역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IT 기업들은 네트워크 및 솔루션 제공을 제외하곤 큰 역할을 할 여지가 없다. 오프라인의 거래 수수료 모델을 파괴한 온라인 증권회사나 금융의 부가가치가 크지 않은 전자화폐에서 페이팔 같은 기업이 생겨난 것은 예외적인 경우다.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의료산업도 비슷한 양상을 띨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 많은 IT 기업이 의료산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이들의 역할은 네트워크, 소프트웨어(SW), 플랫폼 제공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 조선 등 제조업에서도 IT 활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IT 기업들이 부품·소재·SW 분야에서 많은 부가가치를 가져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완성품 제조는 기존 기업들의 몫이다.
그에 비해 교육 산업에서는 인터넷 강의가 낮은 가격과 편의성을 무기로 오프라인의 사교육 시장을 일정 부분 잠식했다. 유통산업에서도 서적(아마존), 티켓(인터파크) 등 오프라인 활동이 중요하지 않은 영역과 오픈마켓에서 파괴적 혁신을 시작한 기업들이 전통 기업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IT 융합이라는 큰 흐름에도 IT 기업들이 다른 산업에 진출해 크게 성공한 예는 별로 없다. 몇몇 신규 진입자들은 기존 IT 기업이 아니라 파괴적 혁신을 기반으로 한 신생기업이 대부분이다. 융합의 흐름에서 실속을 챙긴 IT 기업들은 부품·소재·SW 등 본연의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기술기업들이다. 만약 IT 기업들이 다른 산업에 진출하려 한다면 융합이나 시너지에 매달리기보다는 파괴적 혁신의 기회를 준비하는 것이 맞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