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rologue

 

아주 오래 전에 (이름은 잊었는데) 미국의 유명한 컨설턴트가 “Cannibalize yourself before somebody else does.”라고 얘기하는 걸 들으면서 "그래 맞아.“하며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나중에 내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 사람의 말이 종종 떠올랐다. 그러면서 생각하길, “그 사람은 아마 기업에 근무한 적이 없을 거야.”

“네가 먼저 스스로의 사업을 잠식하라”는 말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다. “네가 지금 가진 것을 지키려고 집착하면 새로운 사업기회도 놓치고, 결국엔 지금 가진 것도 빼앗기게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반화시켜 버리면, 언제나 옳은 ‘공자님 말씀’ 또는 흔히 듣는 경구(警句)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전략적인 의사결정에 가이드라인이 될 수 없다.

다들 옳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기잠식(cannibalization)의 경우에도, 실제 기업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상황에서는 지금이 공격적으로 자기잠식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설사 자기잠식을 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일진대, 자기잠식과 신규 수익원 창출을 조화롭고 매끄럽게 실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글에서 자기잠식을 언제 하는 게 좋은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를 시원스럽게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그런 시도를 할 의도도 없다. 다만 스스로의 사업을 잠식하는 게 좋다는 말들을 하도 많이 하기에, 정말 그런 것인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바를 간단히 정리해 보려는 취지이다. (그만큼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는 글이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좋은 조언과 토론을 기대한다.)

 

 

2. 스티브 잡스와 Cannibalization

 

최근 자기잠식에 관한 얘기가 부쩍 많은 데는 스티브 잡스가 영향을 미쳤다. 잡스의 전기에는 자기잠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잡스의 사업 원칙 중 하나는 결코 자기 잠식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잡아먹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잡아먹을 겁니다.” 아이폰이 아이팟의 매출을 잠식하고, 아이패드가 랩톱의 매출을 잠식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잡스가 계획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p. 645)

 

실제로 잡스는 아이팟이 크게 성공한 이후에는 애플을 “망칠 수 있는 모종의 가능성에 집착”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밥그릇을 빼앗을 수 있는 기기는 바로 휴대전화예요.”라고 지적하면서 휴대전화가 아이팟의 수익을 잠식하기 전에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모토롤라와 협력하여 레이저 폰에 아이팟을 탑재한 ‘록커’였다. 하지만 록커는 외관도 볼품없었고 MP3 플레이어로서의 기능도 부실했기 때문에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누군가와 일을 같이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잡스에게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폰이 나왔다.

잡스가 움직이면 ‘신도’들도 따라 움직인다. 구글에서 cannibalization을 검색해 보면 앞자리의 글들은 전부 애플에 관한 얘기이다.  Salute to Steve Jobs who successfully cannibalized himself before somebody else did!!

 

 

3. 기존 사업에 대한 잠식의 네 가지 형태

 

잡스의 결정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자기잠식을 해야 할 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애플의 상황은 의사결정이 쉬운 편에 속한다. (물론 이 의사결정이 쉽다고 해서 실행도 쉽다는 건 아니다. 자기잠식을 하기로 한 의사결정과 그것을 잘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자기잠식에 대한 의사결정을 고민하기 전에, 먼저 기존 사업에 대한 잠식을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보자. 분류 기준으로 사용한 두 가지는, (1) 기존 사업을 잠식해 오는 제품의 기술수준과 수익성이 높은지 낮은지, (2) 잠식을 당하는 기업이 잠식해 오는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여부이다.

(1)과 관련하여, 현재 판매되는 제품보다 품질이 낮은 기술이라면 수익성도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가 Christensen이 말하는 전형적인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해당한다. 한편 품질 수준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수익성이 높은 건 아니다. 다시 Christensen의 예를 들면, 기존 기업이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의 틀에서 계속 품질을 높이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에게는 ‘과잉품질’이 된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이에 대한 지불의향이 없기 때문에 품질 좋아진 만큼 가격을 올릴 수 없어 수익성은 나빠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의하는 경우는 더 좋은 품질의 새로운 제품이 소비자의 환영을 받아서 기존 제품을 잠식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존속적 혁신과는 다르다. 따라서 고급 기술이 높은 수익성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2)와 관련하여, 잠식을 당하는 기업이 잠식해 오는 제품(cannibalizing product)를 만들 수 있는지 여부는 기술적 역량이 가장 큰 변수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제품을 만들 수는 있지만 신규 기업에 비해 제조원가가 높아서 가격경쟁력이 없다면, 이 경우에는 동일한 제품에 대한 제조 역량은 없는 것이다.

 

 

<표 1> 기존사업에 대한 잠식의 네 가지 형태

구 분

Cannibalizing Product의 기술수준/수익성

Low Tech/Low Profit

High Tech/High Profit

Cannibalized Co.의

 Cannibalizing Product

제조 역량

보유 여부

Yes

II

· VoIP → 유선전화(PSTN)

mVoIP → 무선전화(MNO)

· 잉크젯 → 레이저젯 프린터

I

 

· 아이폰 → 아이팟

 

No

III

 

· 현대 포니 → GM/포드

 

IV

 

· 3G/4G 스마트폰 →

중국 white box 2G 피처폰

 

 

 

(I) 애플의 아이폰이 아이팟을 잠식하는 경우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MP3 플레이어를 만드는 기업이 스마트폰 제조역량을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애플은 사후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I)의 예로서 적합하다.

(II) 기존 기업이 낮은 수준의 기술에 의해서 파괴적 혁신을 당하는 경우이다. 인터넷 전화와 기존 유무선 전화의 관계, 잉크젯 프린터와 레이저젯 프린터의 관계가 전형적인 예이다.

(III) 낮은 수준의 기술에 의한 파괴적 혁신이라는 점에서 (II)와 같다. 그러나 포드나 GM이 포니 수준의 자동차를 만들 수는 있어도 원가를 맞출 수는 없었다. 그들이 설사 한국에서 생산을 하더라도 설계 등 overhead cost가 높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

(IV) 현재 저가의 범용제품을 생산해서 약간의 이윤을 누리고 있는 상황인데, 더 나은 기술의 제품이 등장해서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제품이 이에 속한다. 중국에서 브랜드 없이 제조되는 2G 피처폰은 범용화된 칩 등 저가 부품,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만들어지는 30~40달러대의 제품이다. 이들 기업들의 기술력으로는 (적어도 당분간은) 스마트폰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 시대가 본격화되면 시장이 축소될 것이다.

 

(물론 I/IV 사분면과 II/III 사분면의 중간 영역에 속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듯하다. 즉, 새로운 기술, 더 높은 수준의 기술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수익성 추이는 두고 봐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필름카메라가 디지털카메라에 의해 잠식당한다든지, 브라운관(CRT) TV가 LCD TV에 의해 잠식당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텐데, 새로운 기술이 더 고도의 기술인 것은 틀림없지만, 수익성은 기술 이외에 시장구조 등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사전적으로 예단하기 어렵다.)

 

 

4. 자기잠식(Cannibalization)의 실행 가능성 및 전략 방향성

 

앞에서 기존 사업에 대한 잠식을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보았다. 이제는 각각의 경우에 대해서 잠식을 당하는 기업들이 자기잠식에 대해서 어떤 position을 취할 수 있는지, 그에 따른 전략은 어때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표 2>, <표 3> 참조)

 

 

<표 2> 자기잠식의 실행 가능성

구 분

Cannibalizing Product의 기술수준/수익성

Low Tech/Low Profit

High Tech/High Profit

Cannibalized Co.

Cannibalizing

Product 제조 역량

보유 여부

Yes

II. Cannibalize or Not??

I. Do Cannibalize

No

III. Cannot Cannibalize

(Do not have to cannibalize?)

IV. Try To Cannibalize

 

 

<표 3> Cannibalized Co.의 전략 방향

구 분

Cannibalizing Product의 기술수준/수익성

Low Tech/Low Profit

High Tech/High Profit

Cannibalized Co.

Cannibalizing

Product 제조 역량

보유 여부

Yes

1) 무대응 → M/S 포기

2) 공격적 자기잠식 → 진입

저지/최소화

Cannibalizing Product

‘적기’ 출시

No

신규기업 시장 잠식 최소화

(원가경쟁력/차별화 요소 확보)

Cannibalizing Product

기술 확보

 

 

(IV) 실행은 어렵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하겠지만), 의사결정은 가장 단순한 경우이다. 이는 ‘제발 실제로 벌어지기를 기원하는’ 그런 류의 자기잠식이다. 즉, 현재 기술이 저급 기술이고 곧 고급 기술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에 빨리 자기잠식을 해야 하지만, cannibalizing product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이 없는 상황이다.

해당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자체 기술 개발이나 제휴를 통해서 고급 기술을 확보하여 적극적으로 자기잠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기업은 고급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럼 그 기업은 결국 퇴출되거나, 고급화된 제품의 value chain 상에서 부가가치가 낮은 하나의 기능을 맡는 식으로 변신을 꾀하는 수밖에 없다. (예컨대 Foxconn 같은 저부가가치의 제조 전문기업화(EMS, Electronics Manufacturing Service))

 

(I) 이 또한 복잡한 상황은 아니다. 더 고급 제품이 등장할 것이고, 이는 현재의 제품을 잠식하리라고 예상된다. 그리고 cannibalizing product를 만들 수 있는 역량도 있다. 따라서 자기잠식을 해야 한다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의사결정 포인트는 언제부터 자기잠식을 시작할 것이냐 뿐이다. 자기잠식 실행전략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본다.

 

(III) 자기잠식이라는 관점에서는 단순해 보일 수 있다. 저가제품으로 치고 들어오는 신규기업을 원가경쟁력에서 이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진입을 막을 수도 없고 동일한 제품을 만들어서 경쟁을 할 수도 없다. 단기적으로는 이 시장을 내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로우엔드 시장 진입에 성공한 신규기업이 다음 단계의 제품으로 고급화하려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이에 대응하는 전략 방향성도 극히 상식적이다. 경쟁자만큼 싸게 만들거나, 경쟁자보다 좋게 만들어야 한다. 고상하게 말하면, 먼저 생산기지 이전 및 SCM(Supply Chain Management) 등을 통해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하이엔드 제품에 대해서 초과이윤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기꺼이 높은 가격을 지불할 이유, 즉 ‘차별화 요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애플과 삼성 갤럭시S를 생각해보라...) 한편 메인 브랜드의 지원(endorsement)을 받는 새로운 저가 브랜드 제품을 출시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전략을 섞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약 ‘원가 경쟁력’과 ‘차별화 요소’ 둘 다를 확보한다면, 아주 저가 시장만을 내 준, 높은 이윤과 시장점유율을 향유하는 주류기업으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원가 경쟁력’만을 확보한 기업은 차츰 범용화 되어가는 시장에서 이윤은 줄지만 일정한 정도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는 주요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차별화 요소’ 확보에 성공한다면 점점 中價, 中高價시장을 내주더라도 마지막 하이엔드 제품만은 지키면서 일정한 이윤을 향유하는 틈새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II) 끝까지 피하고 싶은 케이스이다. 고민해야 할 이슈가 많고 그만큼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다. 지금 적당한 이윤을 즐기고 있는데, 신규 기업이 약간 품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충분히 쓸 만한 제품을 아주 낮은 가격에 출시하였다. 기존 기업도 같은 가격에 동일한 제품을 출시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수익성이 현저하게 악화된다. 대응을 안 하면 신규기업이 차츰 시장점유율을 높여갈 것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시장점유율 하락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가제품이 더욱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의사결정 시 고려해야 할 요인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각각의 경우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유선 인터넷전화의 사례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 첫째, 저가제품이 궁극적으로 전체 시장을 대체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 시장만을 대체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저가제품이 시장 일부만을 대체할 것이 '분명'하다면, 굳이 공격적으로 자기잠식할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잉크젯이 레이저젯 프린터를 전부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전화는 경우가 다르다. 데이콤이 070번호로 인터넷전화를 공략할 때까지만 해도 KT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터넷전화 번호이동제도가 시행되고 자기잠식의 우려가 별로 없는 SK브로드밴드도 이 시장에 뛰어들자, KT도 적극적으로 이 시장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인터넷 전화로 모두 바뀌리라는 걸 잘 아는 KT는 이 시점이 자기잠식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으로 판단한 것이다.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치열한 경쟁을 치르면서 균형점에 도달하기까지의 경쟁 과정과 end picture(시장점유율, 수익구조 등)에 대해서도 고려했을 것이다.

둘째, 대응을 하지 않아 시장점유율이 하락함에 따른 손실분과 자기잠식에 따른 손실분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미대응에 따른 손실분이 클수록 대응(자기잠식)의 필요성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만한 시나리오를 몇 가지 제시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유선 인터넷전화 시장에서 신규 진입자들은 인터넷 전화기를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었다. 의미 있는 대응이 되기 위해서는 KT도 인터넷 전화기를 나누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자기잠식에 따른 손실을 아주 크게 만들었다. 그러니 전화기를 공짜로 주어가면서 집전화 가입자를 인터넷전화 가입자로 전환시키느니, 차라리 경쟁자에게 고객을 내주는 것이 나은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이 컸을 것이다. 규제적인 이슈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인터넷 전화에 버금가는 요금경쟁력을 지닌 집전화 요금제 출시를 했다면 자기잠식에 따른 손실분을 더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잠식을 하기로 결정했더라도 자기잠식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 시장점유율 또는 고객기반의 잠재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비록 저가의 고객이라도 그 고객에게 뭔가를 upselling할 여지가 남아있다면, 즉 고객기반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면, 자기잠식이 좀 더 매력적인 option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게 없다면 굳이 자기잠식을 해가면서까지 가입자 기반을 유지할 이유가 없을 수 있다. 극단적으로 가입자 기반을 다 빼앗길 때까지 대응을 하지 않는 게 기업가치 극대화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인터넷전화는 궁극적으로 통합 커뮤니케이션(UC) 플랫폼이 될 수 있고, 거기에 다양한 애플리케이션과 콘텐츠를 결합한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이다. 그런데 KT는 인터넷 전화를 도입하면서 이를 바로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즉, SoIP(Service over Internet Protocol)라는 개념의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고가의 인터넷 전화기를 통해서 음성 전화뿐 아니라 인터넷 접속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인터넷 전화는 품질이 조금 떨어져도 싸기 때문에 찾는 서비스이다. 당연히 요금에 민감한 고객에게 비싼 전화기를 팔면서 거기에 멀티미디어 서비스까지 upselling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자기잠식의 손실분을 이렇게 즉각적으로 만회할 수 있다면, 애초에 자기잠식이 고민꺼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케이스 (II)는 적어도 중단기적으로는 기존 기업의 이익이 무조건 감소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기업은 전체 손실규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즉 기업가치 극대화를 위해서) 자기잠식 개시 시점과 그 강도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고객기반을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야 한다.

 

 

5. 자기잠식 실행에 따른 고려사항들

 

자기잠식을 잘 실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이를 실행에 옮길 때 고려할 요인 몇 가지만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 자기잠식 시점

자기잠식에 따른 손실분을 최소화하는 한편 새로운 가치창출도 극대화하려니 의사결정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점 선택에 있어서 케이스 (I)과 (II)는 고려해야 할 포인트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즉, 케이스 (I)에서는 좀 더 forward-looking position을 취할 필요가 있다. 즉,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면 기존 매출액이 얼마나 줄어드느냐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품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언제 이 제품을 출시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팟에서 아직 돈을 많이 벌고 있으니, 아이폰의 출시를 조금 늦추자는 식의 결정은 바람직하지 않고, 아이폰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언제 출시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장이 별로 활성화되지 않으면 자기잠식이 별로 일어나지 않아 좋고, 스마트폰이 크게 활성화되면 아이폰이 아이팟을 대신해 더 많은 이익을 올려줄 터이니 좋은 것이다. 어느 경우건 애플이 신경 쓸 것은 아이폰의 경쟁력이지, 아이팟의 자기잠식 규모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회사가 이런 자기잠식을 과감하게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미래 시장규모나 그 시장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케이스 (II)가 자기잠식의 손실은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비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고 불확실성이 큰 대표적인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 결과적으론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 자기잠식에 따른 손실분을 최소화하는 쪽에 좀 더 무게 중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2) 추진 조직

Christensen은 파괴적 혁신, 즉 자기잠식을 담당하는 조직은 별도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온라인신문 조직은 종이신문 조직에서부터 분리해야만 종이신문에 해가 되더라도 온라인신문을 키움으로써 궁극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한편 잡스의 자서전에서는 소니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이 사업부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각 사업부는 자신의 이익을 중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전사적인 관점에서 시너지를 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애플은 회사 전체적으로 손익계정을 하나만 운용합니다.”라고 팀 쿡은 밝혔다.

이 둘은 다소 충돌이 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맥락은 같다. 즉, 전사적인 관점에서 의사결정이 되어야만 자기잠식과 같은 어려운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잡스의 말이 맞다. 그러나 파괴적 혁신을 하는 조직을 기존 사업 조직 속에 놓아두면 기존 사업을 중시하는 의사결정, 기존 사업에 젖은 인력과 프로세스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존 조직으로부터 독립시켜 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3) 평가 시스템과 보상, 그리고 할인율(인내력)

말로는 자기잠식을 과감하게 하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기존 사업의 매출액, 판매량 등을 중요한 KPI로 설정하는 한 의미 있는 자기잠식이 일어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기업에서 발견하는 현상이다.

평가 시스템, 평가 및 보상 기간 또한 너무 짧게 잡으면, 특히 케이스 (II)의 경우에 자기잠식과 새로운 수익기반 창출을 끈기 있게 추진하기 어렵다. 한 쪽에서 자기잠식을 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 쪽에서 새로운 가치창출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꼴이다. 앞서 언급한 SoIP의 예가 새로운 가치창출을 하겠다는 마음이 너무 앞선 경우이다.

 

 

6. Epilogue - Cannibalization: It's easier said than done.

 

경영학은 ‘당위(Sollen)'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그리고 경제학은 '존재(Sein)'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있는 현실을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경제학자들이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이유이다. 그에 비해 경영학은 실제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제시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당위론이 지나치면 머리가 하늘을 향하다 못해 발이 땅에서 떨어지게 된다. 당위론적 주장이 언제 어떤 조건 하에서 성립되는지에 대한 좀 더 차분한 고민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보기엔, 자기잠식이 경영자들이 매력을 느끼기에 너무나 좋은 말이다. 그렇지만 경영자들이 실제로 행하기에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하다. 특히 시간에 대한 할인율이 너무 높은 조직에서는...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