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4년 3월 28일

 

1865년 영국은 '적기 조례(Red Flag Act)'를 제정해 자동차 앞에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을 세우고 시내에서는 자동차가 시속 3㎞ 이하로만 운행하도록 했다. 행인을 보호하고 마차와의 충돌사고를 막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자동차 산업의 진화 추세를 거스른 엉뚱한 규제의 대명사가 됐다.
요즘엔 규제 개혁이 가장 중요한 화두다. ICT(정보통신기술) 산업도 예외일 수는 없다. 융합이라는 기술 변화를 촉진하고, 경쟁을 가로막는 규제를 제거하는 것. 이 두 가지가 ICT 규제 개혁의 핵심이다.

최근 ICT 산업의 모든 변화는 융합으로 요약된다. 휴대폰· PC·TV 등 모든 기기가 통합되고, 네트워크 또한 유·무선, 방송·통신의 구분이 없어졌다. 좋은 콘텐츠는 기기와 네트워크, 국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세계인을 사로잡는다. 융합 추세를 따라잡기 위해 ICT 기업들도 합종연횡을 거듭하고 있다. 가전제품·자동차·항공기도 ICT와 융합되면서 '스마트 기기'로 거듭나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디터 체체 회장이 "자동차는 이제 가솔린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로 움직인다"라고 한 말은 이런 상황을 잘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ICT 생태계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지만 우리 규제제도는 새로운 변화를 담아내는 데 매우 더딘 편이다. ICT 산업의 진입규제는 네트워크·주파수·서비스별로 칸막이가 쳐 있어서 새로운 융합형 서비스 도입이 어렵다. 방송·통신 융합 추세를 반영하고자 방송통신위원회가 출범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통합 방송통신 사업법' 제정은 여전히 표류하고 있다. 하루빨리 낡은 진입 규제 틀을 허물어야 융합과 신규 서비스 출현이 활성화되고 콘텐츠와 플랫폼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
ICT와 타 산업의 융합을 가로막는 요인 중에는 법·제도가 가장 큰 문제다. 융합은 산업 경계를 초월하여 이루어지는데, 법·제도는 부처별·산업별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익집단의 저항도 큰 걸림돌이다. 정부는 적극 나서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그런데 어려운 규제개혁은 뒤로 미루고 기술개발과 시범사업에만 매달려서는 제대로 된 융합 성과를 낼 수 없다. 의료·교육 등 핵심 분야를 골라 규제 개혁과 함께 공공수요 창출, 기술개발 지원 등을 패키지로 추진함으로써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 주변의 '적기 조례'들을 폐지할 때 융합이 촉진될 수 있다.

정부는 ICT 산업에서 꾸준히 경쟁을 확대해왔지만 시장 기능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과도한 요금 및 마케팅 규제는 실질적인 경쟁을 가로막고 있다. 예컨대 휴대폰 보조금 규제는 당초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과다한 보조금 지급을 막기 위해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실제로 2008~2009년에 보조금 규제가 없었을 때는 요즘과 같은 보조금 '광풍'이 불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가 보조금 단속을 강화하자, 보조금 지급이 음성화되면서 오히려 이용자 간 차별은 더 커졌다.
차라리 요금 경쟁을 막고 있는 요금 규제와 함께 보조금 규제를 동시에 폐지하면, 사업자들이 요금 인하와 보조금 지급을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경쟁이 활성화되고 더불어 소비자 후생도 증가할 것이다.

 

적어도 ICT 분야에 관한 한 전체 규제 건수를 줄이는 식의 목표는 의미가 없다. 융합과 경쟁 활성화를 가로막는 몇 가지 핵심 규제만을 골라 조기에 집중적으로 개혁하면 ICT 생태계는 아주 튼튼해질 것이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