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가 아닌 경제학 전공자가 가장 기술집약적인 IT산업의 R&D 전략과 R&D 포트폴리오에 관해 고민하는 자리를 맡아서 많이 고생하고 있다. 문제는 나만 고생하는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고생이 많다는 사실이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거나 무지한 자가 용감하다는 식의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굳이 자기 합리화를 안 해본 것도 아니다. 한 눈이 없으면 불편하기 하지만 '일목요연'하게 볼 수도 있다고... 엔지니어들과 미팅을 할 때면, 일단 기술적으로는 중요한 기술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기술개발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곤 이게 산업적, 경제적 관점에서 얼마나 영향이 클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다음엔 정부가 지원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를 묻고 또 묻는다.

 

워낙 기술이 빨리 바뀌다 보니, 매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한다. 거기에 기술 마케팅을 하는 세력들이, 이거야말로 정말 중요한 기술이라고, 이걸 잘 모르면 그건 무식한 거라고, 엄청 나팔을 불어댄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 아주 똑똑한 엔지니어들조차도 - "내가 잠시 다른 쪽을 보는 사이에 아주 중요한 기술이 등장한 모양이군." 하면서 의문을 제기할 생각도 못하게 된다. 무식하다는 소리 들을까 봐...

다음으로는 여기에 학교와 연구소의 순진한 연구자들이 가세한다. 첨단기술을 연구한다고 멋지게 포장을 해야만 연구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세간의 관심을 끄는 분야로 연구 과제들이 몰리고 또 제목은 하루가 다르게 멋있어진다. 제품 광고 타이틀인지 연구 과제 제목인지 구분이 잘 안가는 경우도 있다.

남들이야 관심을 갖건 말건 10년, 20년을 열정(Passion)을 가지고 한 주제에만 몰입하는 모습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유행(Fashion)을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모습이 보여 안타까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이건 연구자의 잘못이 아니다. 남이 관심을 갖지 않는 연구를 계속하다 보면 연구비가 끊기게 되고 아예 아무런 연구도 못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항상 자원배분이 중요한 것이다...연구개발은 5년 정도 후를 내다보면서 준비해야 한다. 그만큼 호흡이 길어야 한다. 기술과 사회, 그리고 경제 트렌드에 대해서 민감하되 지금의 상황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 지식경제부와 R&D 전략기획단이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투자할 10개의 IT 기술을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물론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기술도 중요한 게 많다. 이보다 더 중요하여 이미 다른 프로그램에서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기술들이 꽤 있다. 또 그밖의 필요한 기술들은 기존 프로그램을 통해서 꾸준히 지원될 것이다.

여기서는 2020년 정도의 미래를 볼 때 (1) IT 산업의 가치사슬(C-P-N-T), (2) IT 산업의 생태계, 그리고 (3) IT 산업과 다른 산업의 융합  측면에서 핵심적인 기술들이 어떤 것일까 하는 점을 많이 고민하였다. 

무엇보다 경계했던 것은 Passion이 아닌 Fashion에 대한 유혹이었다.

 

이번에 발표한 보도자료를 첨부한다.

 

■ "IT 10대 핵심기술 (2013-2017)" 보도자료 : IT 10대 핵심기술 2013-201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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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