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제 싸이월드 게시판에 2005년 12월 11일 작성했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1. 박진영 - "딴따라"가 시스템을 말하다
난 직접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좋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성공 스토리가 있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난관을 극복한 어려움이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몇 주 전 박진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에게서 풍기는 힘과 고뇌를 진하게 느꼈다.  김건모의 백댄서에서 출발하여 안무를 배우고, 다시 노래를 배운 후 마침내는 작곡까지의 단계에 도달하기까지의 그의 노력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가 스타와 수퍼스타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는 그가 가진 생각의 깊이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성공해야 그나마 동남아 시장이라도 우리 것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점, 자기가 한국에서 제법 알려진 작곡가라고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미국의 무명 작곡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먹힐 것 같다고 생각한 점, 한국에서 가진 것을 버리고 미국에 2년여 매달려서 드디어 자신의 곡을 빌보드 차트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에서 그의 색다른 발상과 도전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제대로 된 연예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점, 한류가 한 두 명의 스타에 의존해서는 금방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한류를 위해서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서는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맨 주먹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을 직접 일구어 나가면서, -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것이 관행인 당시의 연예계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 그 과정에 축적된 지혜를 자신의 내부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시스템화하려고 했던 것은 "발상의 전환"이라고 느껴진다.

2. 스티브 잡스 - 그에게 시스템은 무엇일까?
박진영의 JYP Entertainment와 애플의 시스템을 비교하려 한다면 이는 한 마디로 웃기는 이야기가 될게다.  그러나 내가 읽은 짧은 지식으로 느낀 잡스는 시스템 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스티브 잡스의 평전, "Icon"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들이 나온다. (게시판에 실린 글, Creativity: Can it be embedded in the system? 참조)

- "스티브는 아주 사소한 문제도 직접 챙기려 드는 마이크로매니저였다."
- "그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또 수시로 마음을 바꿨다."
- "스티브의 세계에 속한다면 모든 면에서 스티브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내야 한다."
- "팀원들은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스티브의 괴벽을 잘 알고 있었다."
- "스티브는 다른 사람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잡스는 직원들의 머리와 마음에 열정의 불길을 유지하는 "불가해한 카리스마"와 직원들을 설설 기게 만들었던 "발작적인 분노"가 있었기에 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저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애플은 가장 창의적인 회사로 꼽힐만큼 창의성을 시스템화하고 있다고 판단되지만, 스티브 잡스가 떠난 후 애플이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그가 복귀한 후 다시 화려한 부활을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 이를 우연이라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는지 모르지만 - 스티브 잡스는 시스템보다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3. 아드보카트 - 리더십인가? 시스템인가?
11월 12일에 치러진 스웨덴전을 보고는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감독 바뀌었다고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지도자의 중요성을 정말 실감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9월 말에 부임한 이후 불과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으니, 갑자기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었을리도 만무이고 감독이 기가 막히게 좋은 작전을 써서 이를 실전에 적용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기에 이는 전적으로 신임 감독의 리더쉽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우선 해이해진 기강부터 다 잡았다.  "트레이닝 센터에 자가용 몰고 오지 마라." "미팅시간 10분전까지 집합하라." "버스로 이동할 때 이동전화 하지마라." "숙소는 내가 배정하는대로 따르라." 등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화하는 지침부터 시달했다.
그리고 그는 선수들간의 경쟁을 불러일으켰다. 최종 엔트리는 월드컵 직전에 확정짓는다고 공언하고는, 취임 이후 처음 열린 이란전에서 해외파에 의존하지 않고 이호, 조원희 등 무명 국내파를 출전시켰다.  어디 그 뿐인가? 스웨덴전에서도 독일에서 차두리를 일껏 불러들여 놓고는 그를 벤치에만 앉아 있게 했다.  이쯤 되면 선수들이 열심히 뛰지 않고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아드보카트가 취한 이런 조치들은 그가 가진 지도자로서의 경험/지식과 더불어 선수들의 신뢰를 사는데 충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축구 대표의 이러한 변화를 모두 그의 리더십 덕으로 돌리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의 지원이 강화된 것이 분명하고, 코칭 스탭 또한 단지 아드보카트가 새로 취임한 것 뿐 아니라, 핌 베어백, 압신 고트비 등 한국을 잘 아는 "시스템"이 함께 따라 왔다.  뿐만 아니라 대표선수들의 존경을 받는 홍명보가 합류함으로써 원활한 정보 흐름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 아닐까? 
아드보카트의 "리더쉽"과 "시스템"이 조화를 이루어 다시 한 번 4강 신화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4. 섀클턴 - 남극 탐험가의 서바이벌 리더십
새클턴은 세 번에 걸쳐 남극 탐험을 시도했지만 한 번도 남극에 도달하지 못한 탐험가이다.
지금부터 80여년 전, 두 팀의 탐험대가 각각 북극과 남극으로 탐험을 떠났다.  칼럭 호는 북극으로, 인듀어런스 호는 남극으로. 공교롭게도 두 팀 모두 얼음바다에 갇혀 배가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조난이 길어지자 칼럭 호의 대원들은 서로 식량과 연료를 놓고 싸우다가 몇 달 만에 11명 전원이 숨지게 되었다.  반면 인듀어런스 호의 대원들은 무려 634일이라는 조난 기간 동안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27명의 대원 전원이 무사히 돌아오는 "기적"을 이뤘다. 이러한 기적은 섀클턴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 십 년이 지난 최근에 다시 그의 이야기가 부각되면서 섀클턴의 리더십을 연구하는 붐이 일고 있으며, 힐러리 클린턴은 섀클턴을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모렐과 카파렐이 집필한 "실패한 탐험가, 성공한 리더(Shackleton's Way)"는 섀클턴의 탐험 여정을 정리하면서 그의 리더쉽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계상황에 처했을 때도 리더로서의 덕목을 놓지 않으면서, 치밀하게 대원들을 이끌어 마침내 전원 생환이라는 기적을 이루어낸 그의 초인적인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대원들이 남긴 말 중 몇 마디를 옮겨 본다.
- "그가 단 하나 요구한 것이라면 우리가 쾌활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대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았다."
- "그 어떤 명령일지라도 모든 일은 즐겁고 자발적으로 수행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대장이 가진 재치와 리더쉽 때문이다."
-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을 일을 절대 남에게 시키지 않았다.  그는 사관실을 웬만한 파수꾼보다 더 잘 청소했다."
- "그는 이끌 뿐이지 몰아세우지 않는다."
- "그는 내가 알았던 가장 위대한 낙천주의자였다. 그는 주어진 시간 안에 앞으로의 계획을 수행할 준비를 하면서 상황에 맞게 계획을 수정하고 여러 가능한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했다."
- "그는 자기 몸에 걸칠 셔츠 하나 없이 지내는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이끌고 있는 대원들의 상태가 중요할 뿐이다."
-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상상이 안 된다. 아마도 확고한 결심과 의지력 때문이리라."
- "나는 스콧, 섀클턴, 모슨과 같이 일했으며 난센, 아문센, 피어리, 쿡, 그리고 다른 여러 탐험가들을 만났다.  내가 내린 결론은 리더쉽의 최고 덕목 중에서도 위험에 닥쳤을 때의 침착함, 어려움에 대처하는 능력, 민첩한 판단, 지칠 줄 모르는 낙관주의, 그리고 이런 덕목들을 다른 사람에게 심어주는 능력, 놀라운 조직력, 휘하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 자신의 이익을 따지지 않는 마음에 관한 한 단연코 섀클턴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고 신사였다."

인듀어런스 호의 부대장인 프랑크 와일드가 한 마지막 말은 섀클턴이 가진 리더로서의 모든 인성과 역량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다른 말을 붙일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워낙 한계상황에서의 특정 개인의 리더십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어차피 시스템화는 어렵겠다는 생각말고는...

5. 리더십 vs. 시스템
이젠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때다.  당연히 제기되는 것은 개인의 리더십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시스템이 더 중요한가 하는 어쩌면 조금은 어리석은 질문.
나쁜 리더의 경우에는 자신이 떠난 뒤에 그 조직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즉, 훌륭한 리더가 등장하여 새로운 시스템을 정립하고 이를 한동안 유지 발전시키다가, 그 리더가 떠나더라도 현저한 퇴보는 없이 현상을 유지하는 - 물론 그 후 새로운 리더가 등장하여 더 앞선 시스템을 정립하겠지만 - 그런 모습이 리더쉽과 시스템의 관계가 될 것이다. 

이쯤 해서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역사란 무엇인가"가 생각난다.  E. H. Carr는 역사에 있어서 위인의 역할이 무엇일까 하는 화두를 던지고는, 위인이 기적처럼 튀어나와서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인이란 단지 역사적인 사건에 이름을 달아주는 꼬리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스마르크가 18세기에 태어났더라면 독일을 통일하지 못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스마르크는 단지 독일 통일 시점의 재상이었을 뿐이라는 해석 또한 옳지 않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Carr가 인용한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은 리더십과 시스템간의 관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한 시대의 위인이란 그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시대의 의지를 그 시대에 전해 주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그의 행위는 그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이로써 그는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