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rologue

 

이동통신 시장에 불법 단말기 보조금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언론에서 ‘빙하기’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시장이 얼어붙고 이동통신사업자들이 납작 엎드린 형국이다. 영업정지 기간이 끝나자마자 정부가 아주 예외적으로 또 다시 과징금을 부과했고, 청와대에서조차 불법 단말기 보조금을 강력하게 규제하겠다는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보거나 논리적인 추론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시장 상황은 지금까지도 늘 그랬다. 시중에 ‘공짜 폰’이 돌아다닐 정도로 단말기 보조금이 지급되다가 정부가 단속을 나오면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불법 보조금을 안 쓰겠다고 다짐하다가 한 사업자가 조금씩 보조금 수준을 높이면 다른 사업자들도 곧 합류한다. 조그마한 구멍가게도 아니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 셋이서 경쟁하는데,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영업정지와 과징금 부과를 당하면서도 왜 이렇게 똑같은 일이 반복될까?

 

 

2. 경쟁 수단으로서의 단말기 보조금

 

통신서비스 시장에서 경쟁은 요금, 네트워크 품질, 고객 서비스, 단말기 보조금의 네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선 요금은 경쟁할 요인이 별로 없다. SK텔레콤의 이동통신 요금은 정부 규제를 받는다. SK텔레콤의 요금이 정부 승인을 받아 결정되면 나머지 사업자들은 요금 구조를 똑같이 설계하고 요금 수준만 SK텔레콤보다 조금 싸게 책정하면 된다. 2, 3위 사업자는 1위 사업자보다 요금이 싸다는 이미지만 심어주면 요금에 민감한 고객들을 끌어들이는데 충분하다. 1위 사업자보다 아주 낮은 수준의 요금을 책정한다고 해서 증가할 고객 수가 많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요금규제가 하나의 기준점을 설정해 주는 셈이다. 한편 품질은 어떤가? 무선 네트워크의 경우 10년 전쯤에는 사업자 간에 품질 차이가 많이 났지만, 이제는 거의 비슷하다. 3사가 모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LTE 전국망을 구축할 정도이니 말이다. 각종 로열티 서비스, 고객센터, 유통망 등의 고객서비스 또한 높은 수준이어서 별로 차별화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네트워크 품질과 고객 서비스는 이미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차별화 요인이 되지 못하고, 요금은 정부 규제가 일정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다 보니 역시 경쟁의 여지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단말기 보조금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치열하게 경쟁할 요소가 별로 없다.

 

그런데 이동통신사업자 입장에서 고객 한 명을 가입시켰을 때 비용이 얼마나 더 들까? 단기적으로는 고객을 등록하고, 매월 요금 고지서를 발송하는 비용 이외에는 거의 없다. 고객이 한 명 는다고 해서 당장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제 한 고객을 월 62,000원짜리 요금제에 2년 약정으로 유치한다고 해보자. 이 고객으로부터 2년 동안 약 110만원의 요금 수입이 발생한다. (월 16,000원 요금 약정할인 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보조금은 27만원까지이다. 세 사업자가 동시에 이 고객을 유치하려고 한다. 보조금은 얼마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보조금을 100만원 지불하고서라도 이 고객을 확보하는 게 유리하다.

 

 

3. 불법 보조금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 - 역설적이게도, 보조금 규제 때문

 

여기까지 읽고는 아마 곧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니, 이동통신 사업자들이 하루살이인가? 모든 고객들에게 100만원씩 보조금을 지급하면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맞다. 그러나 보조금 전쟁은 특이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정부가 말리고, 조금이라도 명분이 있으면 다시 어느 한 쪽이 싸움을 촉발하여 또 확전되고 또 정부가 말리고... 이런 식의, 어느 누구도 망하지 않는 전쟁이 반복되었다.

이동통신서비스 시장에 경쟁이 도입된 이래, 누군가가 먼저 보조금 전쟁을 일으킬 ‘명분’은 끊임없이 있었다. 2004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번호이동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첫 6개월간은 LG텔레콤과 KTF만이 SK텔레콤 고객을 번호이동으로 유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 6개월간은 LG텔레콤만이 KTF, SK텔레콤 고객을 번호이동 할 수 있고, KTF와 SK텔레콤은 상호 번호이동이 가능해졌다. 1년 후에야 3사간의 완전한 번호이동이 실시되었다. 이 기간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후발 사업자들에겐 일시적으로 열린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보조금을 쓸 유인이 충분했다. 1년이 지난 다음에는 SK텔레콤이 ‘실지(失地) 회복’에 나설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그 뒤에도 한 쪽이 보조금 수준을 올릴 명분은 계속 있었다. W-CDMA 주도권 싸움, KT-KTF 합병, LG 통신3사 합병, LTE에 이르기까지...

후발 사업자가 보조금 수준을 높일 때, 만약 후발 사업자가 ‘항복’할 때까지 1위 사업자가 ‘보복’을 한다면 그 다음부터 여간해서는 후발 사업자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업자가 항복할 때까지 전쟁이 이어질 것이라고 사전에 판단하기만 해도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후발 사업자가 항복할 때까지 ‘당할’ 일은 없다. 그 전에 정부가 제재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단순화하면, 정부가 보조금 규제를 없애고, 사업자간에 전면전이 벌어져서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게 정해진 후, 시장의 게임 룰이 정착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한 보조금 전쟁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정부가 보조금 규제를 없애야 보조금 전쟁이 없어질 계기가 만들어질 듯하다.

 

 

4. 요금 및 보조금 두 가지 측면에서 경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그런데 보조금 지급은 과연 나쁜 것인가? 단말기 과소비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2년 약정을 어겼을 때 페널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용자 간 차별 이슈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즉 자주 옮겨 다니는 고객에게만 혜택을 많이 준다는 것인데, 외국의 경쟁 정책당국은 고객 확보를 위해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하는 행동을 고객차별이 아니라 경쟁촉진적인 행동으로 간주하는 경향도 있다.

보조금이 줄어들면 요금인하 여력이 생기기 때문에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나친 보조금 경쟁보다는 요금 경쟁을 활성화하는 게 분명 바람직하다. 하지만 맨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선발 사업자의 불합리한 요금인상을 막기 위한 요금 규제가 도리어 사업자간 요금 경쟁을 막은 측면이 있다는 건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래서 보조금 경쟁이 더 심화된 것이다. 이제 보조금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이를 막으려 했더니, 이것이 오히려 반복적인 보조금 전쟁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 둘 다 규제했더니 요금 경쟁은 안 일어나고, 보조금은 ‘지나치게’ 많이 지급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우선 보조금 규제를 없애는 게 먼저이다. 보조금 규제가 보조금을 없애는데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금 규제도 함께 푸는 게 맞다. 요금인상을 못하게는 했지만, 동시에 요금 경쟁을 억제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업자들이 보조금과 요금을 놓고 적절한 경쟁모드를 찾아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는 이렇다. 보조금 규제가 풀리면 처음에는 걷잡을 수 없이 보조금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만약 선발 사업자가 먼저 이 전쟁에서 발을 뺀다면 시장점유율을 조금씩 내 주면서 그 대신 이익을 챙기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선발 사업자가 후발 사업자를 더 ‘몰아붙이면’ 후발사업자가 견디지 못하고 손을 들고 보조금 수준을 낮출 것이다. 어느 경우건, 균형점에 도달하면 보조금은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때 보다는 낮은 수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젠 후발 사업자의 경쟁력도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보조금이 줄어든 만큼 모든 통신사업자의 이익이 늘어날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보조금 줄여서 통신사업자들 배불리자고 얘기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제 시장에서의 경쟁 압력과 요금 인하라는 정치적 압력이 동시에 작용하기 시작할 것이다. 시장에서의 경쟁 압력이 한계 사업자가 경제적 이윤을 안정적으로 누리는 상황을 놔두지 않는다는 것은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경쟁 압력이 다시 단말기 보조금의 상승으로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그렇지만 후발 사업자들은 이제 싸움을 말려 줄 정부규제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과거처럼 쉽게 싸움을 걸기 어렵다. 선발 사업자는 어떤가? 시장지배력이 강화되기 때문에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을 불러일으킬 걸 뻔히 알면서, 시장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보조금을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정부가 요금규제는 없애고 그 대신 다양한 요금 구조를 만들도록 유도한다면 요금 경쟁이 조금씩 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통화량, 문자 메시지 또는 데이터 량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요금제가 없다는 것이 요금 경쟁이 없다는 단적인 예이다.) 그리고 소비자들도 단말기 보조금이 안정화되면 단말기 보조금에서의 차별화 포인트보다 요금제에서의 차별화 포인트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시장의 플레이어들이 합리성을 되찾으면 보조금 영역에서의 경쟁은 줄어들고 요금 영역에서의 경쟁은 늘어나리라고 믿는다. 결국 보조금과 요금 경쟁의 결합으로 한계기업의 경제적 이윤은 0으로 수렴할 것이다. (물론 과점적인 시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요금 담합의 가능성은 당연히 경계해야 할 일이며, 규제 당국이 강력하게 감시할 필요가 있다.) 

 

 

5. 다른 대안들: 지나치게 반시장적이거나 실현 가능성이 없거나

 

물론 내가 말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결국엔 그리 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단말기 보조금으로 쓰는 액수만큼 바로 요금인하를 해버리자는 얘기도 나온다. 현재와 같은 경쟁 구도와 규제 정책에 실망한 나머지, 정부가 개입해서 보조금을 요금인하로 돌리자는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정부가 보조금 수준도 정하고, 또 정부가 회계장부 다 검토해서 경제적 이윤이 0이 될 수준에 맞춰 요금도 낮추고 하려면 뭐하려고 경쟁도입을 했을까? 정부가 순이익 수준에 맞춰서 요금을 낮출 것이라는 아는 기업이 혁신을 하려고 노력할까? 비용을 줄이려고 애쓸까?

어차피 경쟁압력에 의해서 한계기업의 경제적 이윤은 0에 수렴할 것 아니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각 기업이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 사후적인 균형을 이루었을 때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전적으로 규제에 의해서 경제적 이윤이 0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경영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유통구조 혁신을 통해서 보조금 경쟁 강도와 보조금 수준을 낮추어보자는 견해 있다. 물론 현재의 유통구조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또 퇴행적인 측면도 있다. 유통구조를 개선함으로써 어느 정도 단말기 가격을 낮추거나, 보조금 수준을 줄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유통망이 돌아가도록 하는 돈은 이동통신사업자와 제조업체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제조업체가 사용하는 소위 장려금 문제를 논외로 하면, 결국 이동통신사업자의 보조금 수준이 어떠냐에 따라서 유통망이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말기 보조금 수준이 낮아지고 불법 보조금 경쟁이 사라져서 소비자들이 어디를 가건 동일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이 자리 잡으면, 마치 마약 밀거래하듯이 특정 시간대에 특정 유통망에만 반짝 출현하는 공짜 단말기 같은 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유통구조는 퇴행적인 보조금 경쟁의 결과이지, 그것이 불법 보조금 경쟁을 촉발하는 원인이 아니다.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이동통신사의 고위급 임원이 “가전제품을 사듯 휴대전화도 소비자가 대형 마트 등에서 직접 사서 원하는 통신사와 요금제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보도가 발언의 정확한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단말기 보조금을 하나도 주지 않으면 단말기의 유통과 이동통신 서비스의 가입은 저절로 분리가 된다. 반대로 지금처럼 단말기 보조금이 있는 한 유통망은 통신사업자의 영향권 내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사업자도 단말기 보조금을 안 주는 경우는 없다.

 

 

6. Epilogue - 완전한 시장에 대한 환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완전한 정부에 대한 환상

 

불완전한 시장을 보완하기 위하여 정부가 개입했지만 당초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규제가 시장에서의 경제 논리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정부도 불완전한 대안일 뿐이다. 그러면 그 사이에 상황도 바뀌고 했으니 불완전하나마 시장이 기능하도록 맡겨보는 것도 좋은 대안이다.

시장은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과 비슷하다. 학생들을 방치해 놓으면 위험한 짓도 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학부모나 교사 입장에서 보면 참 답답한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즉시 개입하면 그들 스스로 깨닫고 고칠 기회를 빼앗는 결과가 된다. 큰 울타리를 쳐놓기는 하되, 참을성을 가지고 그들이 스스로 바람직한 해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여론, 전문가, 그리고 정부는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참을성이 많지 않은 편이다.

완전한 시장에 대한 환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완전한 정부에 대한 환상이다. 내가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할 때 항상 되새기는 말이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