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9/20) 조간에 조선일보는 1면 톱에 기초과학 R&D 예산 다시 늘린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댓글 1) 지난 8월 말에 대폭 삭감된 내년도 R&D 예산안을 확정하였으나, 이 중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다시 증액하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신문 관련 기사를 살펴보려고 검색을 했더니, 대통령실에서는 예산 증액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하였고 예산안이 이미 국회에 제출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일과성 해프닝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지난 두 달여 간 R&D 예산과 관련하여 물밑에서 엄청난 소용돌이가 있었다. 나는 지난 7, 두 번의 포스팅에서 정부 R&D 혁신을 통해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댓글 2, 3) 8월 말에 R&D 예산안이 확정 발표되었을 때, 이 포스팅에서 밝혔던 내 견해를 바탕으로 내년도 예산안을 평가하는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한가하게도 스페인에서 놀고 있는 바람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에 연구자들이 집단적으로 R&D 예산 대폭 삭감에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고,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린 것을 계기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 내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정부 R&D 예산안 개요

 

2024년도 정부안의 전체 R&D는 올해 31.1조원 대비 25.9조원으로 5.2조원으로 16.7% 줄어들었다. (정부는 5.2조원 중 1.8조원은 축소가 아닌 R&D 일반 재정사업으로의 재분류로서, 실제 감소는 3.4조원이고, 감소율도 10.9%라고 덧붙였다.)

예산안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산업 분야별 조정: 양자, 2차전지, 바이오, 보안 분야 등은 대폭 증액한 반면, 소재·부품·장비, 감염병 분야는 크게 감액

- 기초연구: 2.6조원 2.4조원(6.2%)

- 정부출연연구소 출연금: 2.4조원 2.1조원(10.8%)

- 중소기업 R&D 지원 사업: 1.57조원 1.19조원(24%)

이 네 가지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하나씩 검토하도록 하겠다.

 

 

 

2. 전체 R&D 예산 삭감

 

R&D 예산 감소는 1964년 정부 R&D 예산 통계 수집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어느 사업이건 예산이 넉넉하면 당연히 좋다. 그러나 예산 제약을 생각하면 무작정 늘릴 수는 없는 법. 그런데 지금까지 R&D는 없는 살림에도 자식들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마인드로 꾸준히 예산을 늘려왔다. 그리고 그만큼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R&D 예산이 제대로 쓰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적어도 지난 10여년간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필요하면 당연히 예산을 늘려야 하지만, 또 꼼꼼히 따져서 낭비가 없도록 하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다소 성역화된 느낌이 있던 R&D 예산도 삭감할 수 있다는 선례가 생긴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 ("그럼 애들 공부는 시키지 말자는 이야기냐?" "과학발전, 그리고 경제발전은 포기하자는 것이냐?"라는 식으로 논점을 전환하여 반박한다면 좀 피곤하다.)

두 번의 포스팅에서 밝혔듯이, 나는 정부 R&D 혁신을 통해서 예산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대통령 비서실에서 과학기술정책을 담당했을 때(‘15-’16) R&D 예산이 19조원이었는데, 당시에도 나는 예산 절대액이 부족하지는 않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지난 4~5년간 예산이 빠르게 늘면서 효율성에 대한 문제 제기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예산안 삭감은 예산 편성 막바지에 대통령 지시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이루어졌다. 관계 부처와 전문가들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나 역량이 부족한 결과다. 짧은 기간에 예산안 조정이 이루어지다 보니, 당초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으나 마치 예산 삭감이 목표가 되어버린 느낌이 있다.

 

 

 

3. 항목별 예산 조정 내역

 

3.1 산업 분야별 조정

산업 분야별 예산 증감액을 보면 그 방향성에 대체로 공감하지만, 이런 식의 사업별 예산 규모 조정은 언제나 있어왔다. 더 중요한 것은 각 산업 분야 R&D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이다.

누누이 강조하였듯이 정부는 시장이 못하는 기초원천 연구, 인력 양성에 집중해야 한다. 시장에서 어떤 제품이 성공할지 판단하고 이를 어떻게 상용화할 것인지는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기업의 몫이며 정부의 능력을 벗어난다. 정부가 출연연 (심지어는 대학)을 앞세워서 3년 미만의 단기 상용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100% 가까이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것은 보고서에나 남는 업적이지 시장에서의 업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난 2021년 정부 R&D 예산의 48.9%가 개발 프로젝트이고, 응용연구도 23.6%, 기초연구는 불과 27.5%에 달한다. 이번 정부 발표에서 개발 프로젝트를 줄이겠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니, 아마 내년 예산에서도 50% 정도가 개발 프로젝트에 쓰일 것이다. 출연연, 대학이 3년짜리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해서 양자, 이차전지, 바이오, 우주, 반도체, 인공지능에서 성공적인 상용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들 첨단분야에서 발주하겠다는 개발 프로젝트는 지금이라도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물론 상당수 상용 프로젝트는 중소기업에 지원되고 있으며 이 부분은 분명 출연연이나 대학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중소기업이 개발하는 상용 프로젝트가 실제 상용화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고, 많은 중소기업들이 그럴듯한 상용 프로젝트로 연명하는 사례들은 너무나 많다.)

 

3.2 기초연구 삭감(2.6조원 2.4조원)

여기서 말하는 기초연구는 대학 교원들에 대한 지원을 뜻하는 것으로, 신진 연구자부터 중견, 리더급 연구자까지 생애주기별로 지원 규모를 늘리면서 능력있는 교원들이 자신이 희망하는 연구를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 예산은 교원 인건비로 쓰이지 않으며 대학원생 인건비, 장비구입비, 실험실습비 등 직접 연구비가 거의 대부분이다. 리더급 연구원을 제외하면 신진 연구자들은 1억원 미만, 중견 연구자들도 2억원 미만으로 일인당 예산도 많지 않다.

대학, 출연연, 기업의 역할 분담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대학은 당장에는 쓸모가 없어 보이더라도 10~20년 이상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함으로써 지식자본 축적에 기여하는 곳이다. 혹시 교수들이 자기만 좋고 아무 쓸모도 없는 연구만 계속하게 할까봐서 걱정이라고? 그런 연구 제안서들은 대부분 다 걸러질 것이기 때문에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다. 도리어 걱정해야 할 것은 교수들이 너무 트렌드를 따라서 우루루 몰려다니는 상황이다. 그리고 기초연구의 실질적 수혜자들은 대학원생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연구주제가 무엇이건, 그 연구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젊은 학생들은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기초연구는 지금보다 도리어 늘려야 한다. 그렇다고 당장에 대학에 대한 전체 지원을 늘리자는 건 아니다. 2021년 현재 대학에 지원되는 6.3조원 중에서 대학이 개발 프로젝트의 주관기관으로 지원되는 예산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첫 포스팅에서 제안하였듯이 대학이 개발 프로젝트의 주관기관이 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면, 그 돈으로 기초연구를 늘려주고도 남을 것이다.

 

3.3 정부출연연구소 출연금 삭감(2.4조원 2.1조원)

여기서 말하는 정부출연연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속 25개 출연연을 뜻한다. 이들의 2022년 예산은 5.5조원인데, 이 중 약 40%가 출연금(인건비, 운영비, 고유 연구 사업비)이고 55%가 정부 수탁과제, 5%가 기업 수탁과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2.4조원에서 2.1조원으로 삭감된 것은 출연금인데, 인건비는 삭감하지 않고 주로 연구 사업비에서 삭감하였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출연금은 늘려주고, 대부분 정부 수탁과제를 그 이상으로 줄이면 전체 예산은 줄이면서도 출연연을 보다 당초 취지에 맞게 운영할 수 있다.

정부 수탁과제는 대부분 PBS 방식(경쟁을 통한 연구주체 선정)을 통해 출연연이 수주해간다. 그런데 이미 앞의 두 포스팅에서 지적하였듯이 PBS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PBS 과제 대부분은 개발·응용 연구다. 그런데 산학연 역할 분담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출연연들은 고유 분야의 핵심원천연구를 대형 과제로 5년 이상으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출연금으로는 인건비를 50% 정도밖에 확보하지 못한 출연연들은 고유 분야의 원천연구는 뒷전이고 당장에 유행으로 떠오르는 단기 프로젝트를 수주하느라 뛰어다니고 있다.

연구 성과 경쟁이 아니라 연구 과제 수주 경쟁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3.4 중소기업 R&D 지원 사업 삭감(1.57조원 1.19조원)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연구개발 예산 중에는 사실상 보조금 성격을 띤 것이 많다. 그리고 적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정부 R&D 예산으로 연명해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들에게 보조금이 필요하면 지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구개발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우회 지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소기업 R&D 지원 예산 삭감은 어렵지만 용기있는 결정이다.

 

4. 마무리: 다시 정부의 역할, 그리고 PBS

 

말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연구개발에서 대학, 출연연, 기업의 역할을 확실하게 정하고, 또 그 중에서 정부가 지원할 것과 시장에 맡길 것을 구분한 후에, 정부 R&D 예산을 거기에 맞춰 쓰면 된다. 대학에는 개인연구자 기초연구 및 인력양성 예산을 늘리고, 출연연에는 출연금을 늘려서 인건비와 원천연구를 위한 고유 연구 사업비를 확보해주면 된다. 그 대신에 정부 R&D 예산의 50%를 차지하는 개발 프로젝트를 대폭 삭감하면 (그야말로 대폭!) 전체 예산을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개별 부처별 예산 규모, 그리고 PBS 개선을 포함하여 부처별 예산 지출 방식(사업 분야, 기초·응용·개발 비중, 산학연 비중 등)을 꼼꼼하게 통제해야 한다.

이번까지 세 번의 포스팅을 했지만,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사실 새로울 게 별로 없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한국의 과학기술 미래를 걱정하는 연구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일단 예산을 늘려놓고 보자는 집단 이기주의적 행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오죽하면 정부 R&D 예산을 최종 심의하는 권한을 가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의장은 대통령)이 이번 R&D 예산 삭감의 취지를 설명하는 언론 기고에서조차 PBS 개선 등 제도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쉽다는 소회를 밝혔을까

하지만 예산을 대폭 삭감한 지난 두 달은 제도 혁신을 하기에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거의 모든 정부에서 이미 수많은 혁신 방안이 되풀이되어 발표되었고, 현실적인 실행 방안도 충분히 검토되었으며 부분적으로 시행된 바 있다.

다른 두 포스팅에서 수없이 지적했듯이, R&D 혁신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부가 뭔가 당장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은 조바심 때문이다. 산업정책부처들은 여기에 편승하여 R&D 예산을 늘림으로써 자신의 일거리를 늘린다. 예산부처는 전체 R&D 예산을 적정 수준에서 통제하는 데 주로 관심이 있지 정부 R&D 역할에 대한 고민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특히 출연금 등 소위 경직성경비의 증가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과학기술 담당부처는 다른 부처들을 이끌고 전체 그림을 만들어 낼 힘이 없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