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축약본은 오늘(2012. 2. 24) 조선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글의 말미에 조선일보 컬럼을 링크하였습니다.

1. IT 산업에서 콘텐츠는 C(콘텐츠)-P(플랫폼)-N(네트워크)-T(터미널, 단말기기)로 이루어진 Value Chain의 한 요소로 중요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텐츠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예술적 측면으로 말미암아 산업적인 관점에서 이를 분석하는 시도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IT와 점점 융합하고 있는 콘텐츠 영역의 발전 없이 IT 산업 전체의 균형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미디어 산업 종사자들이 콘텐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흔히 "Content is King."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Content is King Kong"으로 조금 바꾸어서 Value Chain 상에서 콘텐츠가 갖고 있는 힘을 풍자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애니메이션과 게임 산업은 IT 활용도가 높기 때문에 IT 산업의 다른 부분과 연계성이 크다. 또한 애니메이션과 게임 산업의 세계시장 규모는 각각 1,000억 달러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700억 달러)에 비해 훨씬 큰 규모이다. 그런데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콘텐츠 산업 중에서는 문화적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아 글로벌화하기 쉬운 산업이다. 게임은 아예 말이 필요 없고, 애니메이션은 한국 배우들이 한국말을 써가며 제작하는 영화보다 만화 캐릭터들을 각 나라의 언어로 더빙하여 방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작년 애니메이션 업계에는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작년 7월에 개봉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 전국 관객 수 219만을 기록한 것이다. 이전까지 국산 애니메이션의 관중동원 최고 기록은 2007년에 디지털로 복원하여 재개봉한 “로보트 태권 V”가 가지고 있던 72만이었다.
한국 영화 중 1998년에 개봉한 “쉬리”는 관객 동원 244만이라는 초유의 기록으로 한국 영화 산업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마당을 나온 암탉” 또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1998년 시점에는 어느 정도 저변이 성숙된 단계였기 때문에 "쉬리"가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이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기에는 아직 산업 자체의 토양이 너무 척박한 듯하다.

3. 먼저 수요 측면을 살펴보면, 관객의 저변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현재 TV용 국산 애니메이션의 시청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2000년도 초반만 해도 10% 대의 높은 시청률을 보인 애니메이션이 많았다. 그러나 현재 방영되고 있는 지상파 애니메이션은 모두 1% 미만의 저조한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2005년 국산 애니메이션을 의무적으로 방영해야 하는 ‘지상파 총량제’를 시행하여 애니메이션 수요를 확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덕분에 전체 TV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수는 늘어났다. 하지만 시청률이 낮아 방송사들이 광고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방송사들은 어린이들이 시청하기 힘든 평일 오후 3~4시에 애니메이션을 편성하는 편법을 쓰고 있다. 따라서 단지 의무방영 편수를 채우기 위한 저예산 애니메이션이 양산되고, 이는 다시 시청자 이탈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국내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수요층 또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문화적 선입견 때문에 국내에서는 아직도 어른 관객에게는 소구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도 “마당을 나온 암탉” 이외에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이 개봉되었지만, 모두 몇 만 명 이하의 관객만이 관람할 정도로 참담한 결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4. 공급 측면에서 바라본 한국 애니메이션의 상황도 어렵다.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협소한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파생된 자금의 압박, 인력 수급 등의 어려움 등을 겪고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예컨대 “마당을 나온 암탉 (2011)”은 30억 원 정도의 제작비가 들었으며, TV용 애니메이션도 26부작을 기준으로 약 30억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여기에 최근 트렌드인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경우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국내 애니메이션 중에서 극장 상영 또는 TV 방영만으로 손익분기점에 도달한 작품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 유일하다.
이런 수익 구조는 투자의 위축을 야기하고 그에 따라 질 좋은 작품을 공급해야 하는 제작사에 어려움을 준다. 제작사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투자 유치 방식은 투자 원금 반환 후 수익을 나누는 기관투자자로부터의 투자유치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투자하는 기관투자자는 정부의 모태펀드에서 지원받아 애니메이션 펀드를 운영하는 창업투자사가 거의 전부이다. 그나마 이러한 창업투자사들도 애니메이션은 투자 회수기간이 길고, 불확실성이 높다는 이유로 투자를 기피하고 있다. 작년 7월 기준으로 콘텐츠 관련 모태펀드 투자금액 6,038억 원 중에서 애니메이션 및 캐릭터에 대한 투자는 6.8%인 416억 원에 불과하다.
수익구조 창출의 어려움은 인력 수급의 문제로 이어진다. 열악한 복지 수준과 임금 때문에 애니메이션 산업에 종사하는 인력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CGI 애니메이션 제작 인력의 경우, 게임회사들과 인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 나은 임금과 복지수준을 갖춘 게임회사로의 이직이 심각한 상황이다.

5. IT산업 육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애니메이션 산업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비해 정책적인 관심을 덜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방송법을 개정하여 지상파 및 케이블 PP들의 국산 애니메이션 방송 의무를 강화한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산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관련 부처들의 보다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지원체계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영화나 게임 산업은 관련 기업들의 규모가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가능한 수준이 되었으므로, 정부의 콘텐츠 관련 펀드를 애니메이션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력 양성,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개발에 대한 지원 또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극장, 배급사, 방송사 등 애니메이션 산업을 둘러싼 생태계를 보다 우호적으로 바꾸려는 제도적인 관심도 중요하다.
한국 영화가 현재 수준에 오르는 데는 관련 기업들과 정부의 노력이 어우러져 공급과 수요 측면 모두에서 기본 체력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의 효율적인 지원책들이 시청률을 올리고 관객을 늘리고 제작을 활발하게 한다면 분명 우수한 인력들이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유입될 것이다. 이렇듯 좋은 인력들이 유입되고 수요 공급 측면의 기본 체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에 먹힐 수 있는 작품들이 나오면 산업전반이 선순환 구조로 변할 수 있다. 그러면 제2, 제3의 암탉이 마당으로 뛰쳐나올 것이다.

6. 스티브 잡스가 남긴 업적 중에는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외에도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 스튜디오를 빼 놓을 수 없다. IT산업의 ‘아이콘’인 잡스가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진 것을 우연으로만 돌릴 일은 아니다. 픽사가 세계 최초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1995)” 또한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잡스가 10년간 적자를 감수하면서 그의 당시 재산 절반에 해당하는 5000만 달러를 투자하며 기다려 주었던 직관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토이스토리에 견줄만한 국산 애니메이션이 나오려면 우리도 그만한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다.

■ 조선일보 컬럼(2012. 2. 24)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23/2012022302025.html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