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2006년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일년에 두 차례 발간하는 "경제학부 소식지"에 기고한 글이다.

이 소식지에는 동문들의 기고문이 한 편씩 실리는데, 평소에 알고 지내는 경제학부 교수가 내게 원고를 써 달라고 부탁을 해 왔다. "기라성"같은 동문들도 많은데, 그리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 사양하였으나, 다양한 직업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재삼 청하기에,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에 어쩔수 없이 응락하고 말았다. 

 

가끔 대학생이나 직장 초년병들에게 진로에 대한 조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에게 내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내용은 두 가지이다. "너무 안전하게만 살려고 하지 마라." "뭘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최근에도 비슷한 조언을 해 줄 기회가 있어서 이젠 6년이나 지난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젊은이"에게 조언을 주려고 시작한 것이지만, 내가 나에게 교훈을 주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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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기고>


위험을 즐기는 삶을 선택하라


조  신(SK텔레콤 전무/전략기획부문장)

 

<경제학부 소식지>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훌륭한 동문들이 많이 계신데도 제가 글 쓸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대학, 연구소, 기업체에서 모두 일해 본 조금은 색다른 저의 경험을 재학생들에게 들려주기를 바라는 편집자의 뜻이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저는 ‘77년에 서울대에 입학하여 ’80년대를 미국 유학과 짧은 교수 생활 등 대학에서 보냈고, ‘90년에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들어가 연구자로, 그리고 정책 조언자로 10년을 보낸 후, ’99년 말에 SK텔레콤으로 옮겨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습니다.

‘70년대 후반의 경제학 전공자들은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대세여서, 90여명 동기생 중에서 반 정도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을 정도입니다. 당시는 사회계열로 입학하여 2학년 때 사회대, 법대, 경영대 중에서 선택하던 때였는데, 상대적으로 학구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경제학과를 선택한 측면과 당시에는 관직에 대한 선호가 낮은 편이었다는 점이 이러한 경향을 설명해 주지 않나 생각됩니다. 요즘엔 너무 많은 학생들이 고시 준비를 한다는 교수님들의 우려 섞인 말씀을 듣게 되는데, 당시에도 정운찬 선생님께서 “자원배분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걱정하시면서, “다들 공부만 계속하려 하는데 이럴 때일수록 남들과 달리 민간 부문으로 가면 더 큰 쓰임새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90년대에 독점산업에서 경쟁적인 산업으로 바뀌어간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을 연구할 기회를 가진 것은, 산업조직론을 전공한 경제학자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실험이 불가능한 경제학에서 시장구조(structure) 변화에 따라 행동(conduct)과 성과(performance)가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할 수 있는 실험실적 환경이 주어진 셈이지요. 학생시절에는 다소 관념적으로 느껴지던 경제학 이론이 현실분석에 아주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저는 경제학을 전공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통신과 같은 자연독점 산업에서는 정부가 진입·가격규제를 통해 자원배분을 담당해 왔는데, 경쟁도입은 자원배분 기능이 점차 정부로부터 시장으로 넘어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통신서비스에서 완전경쟁은 어차피 불가능하고, 우리나라는 개별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이 일반화되어 있다 보니, 독점에서 경쟁으로의 이행기에 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정부 만능주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완전한 시장에 대한 환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완전한 정부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99년 말에 SK텔레콤으로 옮기기로 한 결정은, 연구자들이 기업체로 경력 변화를 한 사례가 많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연구소 생활에 익숙해지고 연구 주제 또한 비슷한 내용이 반복됨에 따라, 제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증가율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을 느꼈고, 이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업체로 옮긴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떤 직장이 제일 좋더냐, 회사와 학교·연구소와 어떤 점이 차이가 있더냐, 일반 기업에서도 경제학이 도움이 되더냐는 등의 질문을 종종 받게 됩니다.

제 경험에서 미루어 보면 어떤 직장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자유로움을 즐겼다고 한다면, 연구소에서는 좋은 연구 환경과 연구결과가 정책에 반영되는 뿌듯함이 있었고, 기업에서는 긴장감과 성취감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 취향에 따라 자신에게 좀 더 적합한 직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하느냐가 삶의 풍요로움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경제학부 학생들이 직장을 찾는데 있어서 안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사회 전반의 불확실성 증가에 대응하여 개인적으로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노력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위험을 회피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되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인생관에 비추어 자부심이 넘치는 선택인지 자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기업체로 옮긴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이, 회사는 “정치”가 난무하고 연줄이 없으면 출세하기 어렵기 때문에, 저같이 물정모르는 사람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업으로 옮긴 후에, 어떤 조직에서건 communication, coordination, 그리고 cooperation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을 실감하였습니다. 이러한 덕목과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연줄이 없고 정치를 몰라도, 조직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간 기업이 다른 조직에 비해 효율성을 중시하고 성과 중심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점들이 가져다주는 불안감보다는 예측 가능성을 좋아한다면 기업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경제학이 좋은 학문이라는 점을 저는 기업체로 옮긴 후에 더욱 실감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적 통찰력은 산업의 향후 추세를 전망하는데 유용한 틀일뿐 아니라, 구체적인 경영전략과 관련된 의사결정에서도 훌륭한 안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재학생 여러분도 경제학의 이론적 기초를 탄탄하게 쌓는 것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추세가 융복합화 되어가는 것을 감안하여 인문학적 소양을 착실하게 쌓는 것도 중요합니다. 인문학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인문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전략, 정책적인 의사결정에도 많은 통찰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해 서점에 넘쳐흐르는 경영관련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 중 상당수는, 이론적 토대 없이, 때로는 상충되는 수많은 사례를 열거하고 있어서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듯 합니다.  따라서 독서에 있어서 지나치게 유행을 따르기 보다는 해당 분야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책들을 읽기를 권합니다.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자기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가 주어질 뿐 아니라, 다른 것을 시도하는 데서 오는 새로움과 자부심도 함께 할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도 남들이 무엇을 하느냐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기보다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에 따르는 위험을 즐기는 삶을 살라는 권고로 글을 맺으려 합니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