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0123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란 개념을 만들어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센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이론이 지난 수십 년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영학 이론이며, 지금 한참 전개되고 있는 digital transformation을 설명하고 전망하는데 매우 유용한 분석 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경영 서적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The Innovator’s Dilemma”“The Innovator’s Solution”은 몇 차례 반복해서 읽었고 그 때마다 새로운 인싸이트를 얻곤 했다.

(종종 제국주의적이란 비난을 듣는 경제학 전공자들은 경영 서적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유명한 경영 서적을 읽고 나면, 마치 드라이버는 머리 들지 말고 가운데로 똑바로 치면 돼.”라는 말을 듣는 듯한 느낌? 예외적으로 아주 좋은 경영 서적을 만나면, “이건 경영학 서적답지 않군. 경제학 이론적 바탕이 튼튼해!”라고 말한다. 이러니 제국주의자란 소리를 듣지...)

 

2. 

그가 파괴적 혁신을 개념화한 것은 1990년대 말이었는데, 내가 그의 이론을 제대로 접한 건 2000년대 중반 전략기획부문장을 맡아 SK텔레콤의 성장에 대해 고민할 때였다. SKT는 전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모바일 인터넷을 드라이브하고 있었고 많은 성과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인터넷 기술은 본질적으로 파괴적인데 이를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에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우량 고객을 대상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들어서 더 높은 매출을 올리는 방향으로 즉 존속적 혁신의 방향으로 - 모바일 인터넷 전략을 펴는 것이 맞는가, SKT가 모바일 인터넷을 바탕으로 파괴적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고민들이었다. 2006년 실리콘 밸리에서 CEO를 포함한 주요 임원 20여명이 참가하는 성장전략 워크샵을 일주일 간 가졌는데, 그 중 하루는 크리스텐센 교수를 초청하여 파괴적 혁신에 대해 강의를 듣고 토론을 나누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3. 

파괴적 혁신은 현재의 주류 고객에게 더 좋은 성능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기존 제품보다 품질은 낮지만 가격이나 편의성 등을 무기로 기존 제품을 대체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한다. 초기에는 품질이 나빠 대부분의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기 십상이지만, 기술진보가 워낙 빨리 일어나기 때문에 머지않아 평균적인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크리스텐센은 전기로로 철강을 제조하는 미니밀(mini mill) 기업들이 초기에는 저가/저급의 콘크리트 철근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차츰 품질을 개선하여 20년 후 최고급 강판을 생산하여 종합제철소를 능가하게 된 것을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다. IT 분야에서는 소형 라디오에서 시작하여 대형 TV의 진공관을 대체한 트랜지스터, 메인프레임보다 품질이 낮지만 낮은 가격으로 새로운 컴퓨터 시장을 창출한 PC가 고전적인 예다. 인터넷 및 라우터,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서비스들도 기존 서비스를 파괴(disrupt)하였는데, 인터넷 전화(vs. 집 전화), 카카오톡(vs. 문자 서비스)이 대표적인 사례다.

내가 보기에는 IT 산업의 특성과 변화 양상이 파괴적 혁신 이론에 가장 잘 맞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digital transformation이란 것이 모든 산업에 디지털 기술의 활용이 증가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이 또한 파괴적 혁신 이론의 분석틀이 유용하다고 믿는다.

크리스텐센의 이론이 훌륭한 것은, 혁신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 시장구조는 어떻게 바뀔 것인지, 그리고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서 누가 많은 몫을 챙겨갈 것인지를 설명하는데 이 이론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기존 기업들이 존속적 혁신을 바탕으로 한 경쟁에서는 대체로 신규 진입자들에게 승리하지만, 파괴적 혁신 경쟁에서는 조그마한 신규 기업에게 패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기존 대기업들이 기술이나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과 충돌이 있거나 시장 규모/수익성이 너무 작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괴적 혁신의 결과 종종 신규 기업이 독과점적인 시장지위를 누리는 경우가 많고, 그에 반해 존속적 혁신이 지속되는 산업에서는 기존 시장구조가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기존 기업들이 파괴적 혁신을 빨리 받아들여서 시장에서 계속 주도적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 이런 경우에는 파괴적 혁신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기존 기업들이 파괴적 혁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거나, 비용 절감/가격 인하를 이루어냈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존 기업이 시장점유율은 계속 유지하더라도 수익성은 약화되었을 것이고, 가치사슬 상의 상류(upstream) 기업 and/or 최종 소비자가 누리는 가치가 증가되었을 것이다. (키움, e*Trade 증권 등 신설 인터넷 증권사들이 등장하여 수수료를 대폭 인하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기존 증권사들도 인터넷 증권 거래 수수료를 인하한 것이 한 가지 예다.)

크리스텐센은 기존 기업들이 파괴적 경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논의를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 무리가 있겠다.

 

4. 

크리스텐센 이후, 적어도 혁신에 관한 논의에서는, ‘파괴적 혁신은 고유 명사가 되었다. , 크리스텐센이 내린 정의, 이론적 틀, 시사점들이 맞물려서 하나의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 용어를 보통 명사로 사용하면서 크리스텐센의 이론과 적당히 뒤섞어 자신의 구미에 맞게 변형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컨설팅, 언론,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도 한 산업을 흔들만한 큰 변화가 일어나서 기존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지칭하는 의미로 파괴적 혁신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큰 변화를 가져온 혁신을 파괴적 혁신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특정한 이론적 틀을 갖추지 않은 그냥 형용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들은 파괴적 혁신이라는 유행어에 편승하여 자신이 설명하는 내용이 바로 파괴적 혁신이라며,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이라고 공포 마케팅을 펴는데 이 용어 이론이 아닌 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보다 못한 크리스텐센은 2015년말 HBRWhat is disruptive innovation?이란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파괴적 혁신에 관한 제대로 된 글이나 책을 보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너무나 자주 자신들이 그렇게 부르고 싶은 혁신을 파괴적 혁신이라고 지칭한다.”고 꼬집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스마트폰이 파괴적 혁신이고, 전기 자동차, 자율주행 자동차, 핀테크 서비스들도 세상을 바꿀 파괴적 혁신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크리스텐센의 이론에 따르면 (피처폰의 진화 관점에서 본) 스마트폰, 전기차, 자율주행차, 대부분의 핀테크 서비스는 존속적 혁신이다. 그 정의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해당 산업이 어떻게 변화할지 전망하는데 이 구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따지는 것이다.

특정 기술을 마케팅하기 위해서 파괴적 혁신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녀도 좋다. 그러나 크리스텐센이 주장한 그 유명한 파괴적 혁신이라고는 이야기하지 말고, 자신이 혁신 전문가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5. 

크리스텐센은 모르몬교 신자로 모르몬교 대학인 Brigham Young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재학 중에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을 만나면 짧은 한국말 인사를 건넸다. 오래 전에 암에 걸려서 6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내 강의에서 그의 이론을 많이 다루고 있다. “ICT 산업론에서는 3주 동안 그의 이론을 강의하고 관련 케이스들을 토론하고, “Digital Transformation 전략과목에서 다루는 9개의 케이스에서도 대부분 그의 이론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ICT 산업론 강의 노트 중에서 파괴적 혁신과 자기 잠식, 그리고 모듈형(수직 분화형) 구조와 범용화에 관한 부분을 이 블로그에 첨부하였다. 강의 노트는 실제 강의와 함께 전달된다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강의 노트만을 공유하는데 주저함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이 세상에 기여한 것에 경의를 표하는 취지에서다.

 

강의노트-Disruptive Innovation.pdf
1.53MB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