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3년 10월 25일

 

전전자교환기(TDX)와 CDMA 이동통신 시스템. 이 둘은 정부 주도로 성공한 대표적인 기술 개발 프로젝트다. 이 외에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우리나라 IT 분야 곳곳에는 정부 기술 개발 지원의 손길이 닿아 있다. 원래 연구·개발은 공공재적인 성격이 크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건 정부 개입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 IT 산업은 그 강도와 기여도 면에서 아주 이례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리 IT 기업들이 크게 성장했고 시장도 빠르게 변화하는데 기술 개발 정책은 이를 못 따라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IT는 기술 변화가 워낙 빨라 매일같이 새로운 기술이 나타난다. 그렇다 보니 세간의 관심을 끄는 분야로 연구 과제들이 몰리고 또 제목은 날로 멋있어진다. 제품 광고 카피인지 연구 과제 제목인지 구분이 잘 안 될 정도다. 또 정부 정책 변화에 따른 쏠림 현상도 뚜렷하다. 지난 정부 때 '녹색성장'이 기술 개발의 화두였다면, 이번 정부에서는 '창조경제'가 연구 과제에서 필수적인 수식어가 되고 있다.
정부 출연 연구소나 대학이 단기 상용화 과제를 수행하는 것도 문제다. 상용기술 개발은 시장 트렌드와 소비자 니즈를 알아야 성공할 수 있는데, 연구소나 대학이 이 면에서 기업에 비해 우위에 있지 않다. 또한 '플랫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존재하는 기술들을 단순히 하나의 시스템으로 엮어내는 과제들이 많은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남들이야 관심을 갖건 말건 10년, 20년을 열정(Passion)을 가지고 한 주제에만 몰입하는 모습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유행(Fashion)을 따라 몰려다니며, 엔지니어들이 연구 계획서를 잘 쓰는 데 몰두하여 'A4 엔지니어'가 되어 버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부 정책의 영향이 크다. 정부 관계자들은 아무래도 단기적인 결과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그 시점에서 주목을 받는 기술, 당장 제품화에 도움이 되는 기술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IT산업이 취약한 과거에는 정부가 시장을 대신하여 단기적인 상용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렇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현재 우리나라 총 연구·개발비 지출에서 정부 비중이 약 26%인데, IT산업에서는 그 비중이 약 10%에 불과하다. 그만큼 민간 기업의 역할이 크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부의 기술 개발 지원은 시장을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먼저 상용 개발 지원은 중소기업으로만 대상을 국한해야 한다. 물론 다수 중소기업이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대기업이 주도하는 것은 좋지만, 이 경우에도 자금 지원은 최소화해야 한다. 연구소·대학은 기업이 할 수 없는 장기적인 원천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경쟁을 통해 출연 연구소에 연구 과제를 배정하는 PBS(Project-Based System)도 부작용이 크다. 지금 '출연연' 연구자들은 연구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정부 구미에 맞는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고 이를 '세일즈'하러 다니는 데 쓰고 있다. 물론 경쟁은 필요하지만 그럴듯한 프로젝트를 만드는 게 아닌 좋은 결과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예산은 개별 출연연과의 협의를 통해 배정하고, 기관장에게 연구 과제 선정 및 평가 권한을 줘야 한다. 그리고 3년 임기로는 장기적인 연구 과제 몰입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를 늘릴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IT산업 발전에 정부의 기술 개발 정책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긴 안목을 가지고, 정부와 시장의 역할, 연구·개발 주체 간의 역할 분담에 대해 근본적인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