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은 정부 R&D에 별 관심이 없다. 외부인들이 알기 어려운 전문 분야이기도 하고, 그 결과가 당장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언론에 크게 나오는 건 연구비를 횡령해서 술값으로 썼다거나 교수가 학생 인건비를 가로챘다거나 하는 경우뿐이다. 예산이 31조원이나 된다지만, 요새는 걸핏하면 들리는 숫자가 10-20조이니 이 또한 별로 큰 액수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요소투입(인력, 자본) 증가가 둔화, 감소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의 유일한 동력은 기술혁신이다. 오늘날의 정부 R&D10-20년 후 한국 기술 stock의 질과 양을 결정짓고, 기업이 이를 기반으로 상용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기술정책은 정말 중요한 분야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30-40년 후에 공적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가 여기에 달려있다고 하면 조금 관심을 가지시려나?^^

 

얼마 전에 윤석열 대통령이 31조원에 달하는 R&D 예산이 나눠먹기 식, 갈라먹기 식으로 비효율적으로 집행되고 있다며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국가 R&D 예산이 일부 인사에 의해 좌우되며 특정 세력이 계속 연구비를 나눠먹기 하는 사실상의 '연구비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각 분야별 전문가는 뻔하니, 그들끼리 과제 기획, 평가, 수행을 서로 사이좋게 주고받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때 갑자기 예산이 늘어나서 돈이 넘쳐나는 측면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R&D 예산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참고로, 내가 대통령 비서실에서 과학기술정책을 담당했을 때 R&D 예산이 19조원이었는데, 당시에도 나는 예산 절대액이 부족하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연구비 카르텔 이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R&D에서 정부와 시장의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정부 역할에만 집중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정부는 시장이 못하는 영역에만 집중해야 한다. 한국이 추종자(follower)였을 때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지 않았으며 참여자들의 역량을 집결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정부가 개발할 기술을 정하고 정부출연연과 기업들이 공동 기술개발을 하는 것이 유효한 전략이었다. 전자교환기(TDX) CDMA 상용화가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국가 R&D 지출액이 세계 5(····)에 이를 정도로 선도자(first mover)가 되었다. 그런데 선도자들은 어떤 기술을 개발해야 성공할지 어떤 제품이 시장에서 먹힐지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기술선택이나 연구개발이 더 효율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시장에서 어떤 제품이 성공할지 판단하고 이를 어떻게 상용화할 것인지는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기업의 몫이지 정부 몫이 아니다.

그럼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연히 기업이 하지 못하거나, 할 인센티브가 없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연구개발은 전형적인 공공재다. 예컨대 많은 기초연구 결과는 논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조직들도 그 결과를 공유할 수 있다. 대학에서 양성된 고급 연구인력 또한 기업들은 그 인력을 데려다 쓸 생각만 하지, 오랜 기간 육성할 인센티브는 없다. 이처럼 기초연구나 연구인력 양성 등은 무임승차를 할 유인이 많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시장에만 맡겨 놓았다가는 바람직한 수준까지 자원배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2.

이제 자연스럽게 연구개발 주체간의 역할 분담 이슈로 이어진다. 정부는 무엇보다 기초연구 지원과 인력 양성에 집중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주로 대학이 잘하는 분야다. 능력있는 연구자들이 당장에 성공·실패를 따지지 않는, 수십 년이 걸리는 bottom-up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편 대학에서 수행하는 연구는 모두 고급인력(대학원생) 양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훌륭한 인재는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대학에 지원하는 연구비는 기본적으로 성공 여부를 따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는 곧 대학이 정부가 지원하는 상용제품 개발 사업에 주관기관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어떤 교수가 정말 좋은 상용가능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기업들이 알아서 프로젝트를 의뢰할테니 정부가 지원할 필요가 없다.) 상용기술 개발은 시장 트렌드와 소비자 니즈를 알아야 성공할 수 있는데 대학이 이 면에서 기업에 비해 우위에 있지 않다. 물론 기업이 주관하는 상용개발 프로젝트에 대학이 보유한 원천기술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참여기관으로 힘을 합하는 것은 장려할 일이다.

정부의 상용개발 프로젝트 지원액은 대폭 줄여야 한다. 정부, 특히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부처들은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 시점에 주목을 받는 기술, 당장 제품화에 도움이 되는 기술에 초점을 맞춘다. 민간기업이 취약했던 과거에는 정부가 시장을 대신하여 단기적인 상용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필요했지만, 이제 이 영역은 자금력과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넘쳐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R&D는 아직 추종자 마인드로 무장되어 있다. 정부출연연 12조원 예산(‘21년 기준) 중에서 개발 프로젝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53%에 이르고, 대학 예산 9조원에서도 30%가 개발 프로젝트이며 기초연구는 39%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상용제품 개발 지원은 중소기업으로만 대상을 국한해야 한다. 정부출연연 또한 대학과 같은 이유로 정부가 지원하는 상용제품 개발 사업에 주관기관으로 참여하는 것은 제한하는 것이 맞다.

 

3.

지금처럼 경쟁을 통해 정부출연연에 연구과제를 배정하는 PBS(Project-Based System)는 예산 절감 차원에서나 R&D 생산성 관점에서나 폐지하는 것이 맞다. 지금 출연연 연구자들은 연구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과제 기획과 연구비 확보에 쓰고 있다. 출연금을 통해 안정적으로 지원되는 인건비가 50% 정도에 불과하니 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인건비 확보를 위해 각 부처의 PBS 과제 수주에 몰두할 수 밖에 없다.

인건비 확보를 위해서는 과제 규모를 키워야 하다 보니 불필요한 장비 구입 등으로 연구비 규모를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과제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규정은 없지만, 내가 알기로는 암묵적으로 30% 정도를 넘지 않도록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장비 구입을 많이 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정작 필요한 고가 연구장비를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아직도 쓸만한 노트북, 태블릿만 교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대학이 수주하는 과제는 학생들 인건비만 책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덜하다.) 인건비 대부분을 출연금으로 지급하고 그 대신 PBS 과제를 대폭 축소하면 예산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출연연끼리는 물론, 대학, 기업들과도 과제수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연구주체들의 역할 분담이나 차별화 포인트는 기대하기 힘들다. 또 과제수주 경쟁은 유행을 좇는 연구, 단기적으로 쉽게 성과가 나는 연구과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토양에서는 언제라도 제2, 3로봇 물고기프로젝트가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

물론 경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럴듯한 프로젝트를 만드는 게 아닌, 좋은 결과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4.

이런 환경 하에서는 정부출연연들이 기관 미션에 따른 분명한 연구목표 설정없이 여러 분야를 백화점식으로 연구할 수 밖에 없다. 연구원들이 자신의 과제와 자신의 인건비를 PBS를 통해 확보하는 것이 일상화되다 보니, 심하게 말해 연구소는 연구자 조합이 되어버렸다. 연구소장은 예산권, 인사권이 별로 없는 조합장인 셈이고.

이제는 정부출연연에게 PBS가 아닌 방식, 예컨대 출연금으로 인건비 포함 연구개발 예산을 배정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항공우주연, 원자력연구연 등 공공기술형 연구원은 이런 방식으로 되어 있으나, 산업기술형 연구원(전자통신, 기계, 화학, 건설 등)들이 문제다.) 연구과제는 ① 고유의 미션 사업에 집중하고, ② 최소한 5년 이상, ③ 중대형 ④ 원천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선정하도록 하면, 기업 및 대학과의 역할 분담이 비교적 분명해질 수 있다. 출연금은 개별 출연연과의 협의를 통해 배정하고 기관장에게 연구개발 과제선정 및 평가 권한을 줘야 한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3년 임기로는 장기적인 연구과제 몰입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를 늘리는 것이 좋겠다.

보다 장기적으로 산업기술형 연구원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이들 연구원은 우리가 선도형 기술개발 국가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이들 연구원의 역할은 정부지원만으로는 자기완결적인 구조를 갖기 어렵다. , 원천기술을 개발한 후에는 이를 상용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들과 협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들은 PBS 대신 기업과제 수주를 늘리도록 독려하고 장기적으로 예컨대 10계획을 세워서 정부 예산을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

 

R&D 예산을 줄이자고 하면 과학기술계 분들이 불편해 할 것이다.

정부가 단기 실적주의에 매몰되어 시장이 해야 할 역할까지 나선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오늘날과 같은 기술패권 경쟁 시대에 정부가 손을 놓고 있으란 말이냐는 비판도 나올 법하다.

나는 1989년 기업의 R&D지출 요인에 관한 박사논문을 쓴 이래, 산학연관에서 기술개발에 관한 고민의 끈을 놓은 적이 없다. 2010년 이후에는 5년 정도 정부 전체 및 산업부 R&D 정책 수립 및 예산 배정에 직접 간여하였다. 그리고 대학에서 2년간 상당히 큰 공학연구소의 책임자로 행정 및 프로젝트 선정을 주도하면서 대학의 연구 실태에 대해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기술혁신 프로세스를 혁신하지 않으면 정부는 예산을 엄청 늘리면서도 연구자들을 제대로 대우하지도 못하고, 또 기술혁신 성과 또한 미미할 것이라는 걱정이 커졌었다.

대통령 비서실에서 일할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비슷한 정책 방향을 2015년과 2016년 발표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의 국가과학기술 혁신 의지는 확고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곧 불어닥친 탄핵 바람으로 거의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 하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