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주 포스팅에서 시장에 맡겨도 될 일에서 정부가 손을 떼면 R&D 예산이 많이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아래 그림을 보면 한국이 주요국에 비해 유난히 정부 R&D 예산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은 2011년과 2021년 기준으로 EU 국가들과 한국, 미국, 일본의 (R&D 예산/GDP) 비율을 비교한 것이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한국인데, 2011년에 비교 대상 국가 중에서 1(1.07%)였고, 2021년에는 GDP 대비 비중(1.32%)이 더욱 커졌다. (즉 정부 비중이 늘어났다는 것) 주요국 중에서는 독일이 비교적 근접한 수준이지만 다른 나라들은 한국에 비해 크게 뒤지는 편이다.

여기에 대해,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축적된 과학기술 자본(stock)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정부가 더 많은 역할을 하는 게 맞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과학기술 자본 축적을 위해서는 기초연구를 더 많이 육성해야지, 지금처럼 개발 프로젝트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2.

지난 10여년간 정부 R&D 혁신방안을 논의할 때면 기초 및 원천 연구 확대, PBS 제도 축소 등이 으레 단골 메뉴로 포함되어왔다. 이 중에서 대학에 대한 기초연구 지원은 상당히 늘어났지만, PBS 제도나 과도한 상용개발 프로젝트 지원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 개선한다고 말은 하면서 실제로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정부가 뭔가 당장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은 조바심이 가장 큰 원인이다. 예컨대 새로운 기술 등장으로 반도체 산업이 요동치고 있다는 보도들이 이어지면, 정부는 관련 기업들과 전문가들을 소집하여 몇 차례 회의를 하고 3대 정책 방향, 5대 전략 과제를 도출한다. 여기에는 정부가 R&D 자금을 OOO억원 지원하여 세계 1위 소재부품 O개를 육성하겠노라는 구체적인 청사진이 포함된다.

반도체 산업이야 한국을 먹여 살리는 산업이니 그렇다고 치고, 전 부처를 합하면 틀림없이 매년 수백 건의 ‘OO산업 육성 종합대책이 발표될 것이다. 이 대책에 맞춰서 2~3년 내에 가시적인 결과물 산출을 목표로 하는 이 정부 내에 성과를 내야 하니 이보다 더 길면 안된다. - 개발 프로젝트가 몇 개 발주된다. 다음 해에는 새로운 국장과 과장이 와서 또 뭔가 새로운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또 거기에 필요한 개발 프로젝트들이 발주된다. 인건비를 확보해야 하는 출연연들은 각 부처가 무슨 기술에 관심을 가지는지 열심히 파악해서 자신이 수행할만한 과제가 채택되도록 열심히 마케팅한다. 프로젝트 수행기관을 선정할 때 누가 봐도 이 연구는 A 출연연이 해야 해라고 동의할만한 경우는 별로 없다. 출연연이 상용화 프로젝트에 그 정도 탁월한 경쟁력을 갖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여러 출연연이 이건 우리가 잘 할 수 있다고 나서니 정부부처가 위험을 무릅쓰고 특정 연구소를 지정할 유인이 없다. 그리고 연구소들끼리 경쟁을 시키면 여러 가지로 부처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과제는 PBS 방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과제가 발주된 다음에는 정부 관계자들은 큰 관심이 없다. 당초에 과제를 만든 공무원은 이미 다른 부서로 옮긴 다음이니... 그래도 어쨌거나 그 과제는 당초의 개발 목표를 달성하여 성공한 것으로 종료된다. 하지만 개발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상용화 성공이다. 그런데 출연연이 수행하는 과제에 기업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시장 니즈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고, 과제 종료 이후에도 이 결과물을 실제로 상용화할 주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상용화 프로젝트는 기술력과 자금력을 갖춘 기업이 수행해도 막상 시장에서 돈을 벌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 시장 니즈도 잘 모르고, 제품 상용화 이후의 follow-up 계획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수행할 주체가 되지도 못하는 출연연이 이를 주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뻘짓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정부는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일, 출연연이 가지고 있는 원천기술을 상용화하고자 하는 기업들과 출연연을 연결시켜주는 일 등에 집중해야 한다.

 

3.

내가 어쩌다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 정부가 벌이는 쓸데없는 일을 줄이고, 최소한 내가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는 말자고 수시로 다짐하였었다. 그런데 일 년쯤 지나서인가, 비서관, 행정관들과 회의를 하면서, "공무원이 되어 보니, 아무 것도 안 하려고 꾹 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자꾸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정권 핵심 집단의 능력과 태도 문제이다. 이건 보수, 진보 정권 막론하고 공통적인 문제인데,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경험이 부족했거나, 애초에 그런 고민을 할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다음으로 직업 공무원들의 '독수리 5형제' 마인드를 들 수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 중 하나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힘까지 갖추었으니,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처럼 우리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사명감을 가질 수 밖에. 물론 관료 집단이 그렇게 순진무구하지만은 않다. 경제학에서는 개인은 효용 극대화,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행동한다고 가정하고 있으며, 같은 맥락에서 정치경제학에서 행정부는 '예산 및 조직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가정한다. 뭔가 일을 벌여야 예산과 조직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더구나 인허가 제도가 많이 줄어들었고, WTO 체제 하에서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도 여러 가지 제약이 많다 보니 산업정책을 담당하는 부처들 입장에서는 R&D 예산이 거의 유일한 정책 수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각 부처는 R&D 예산 확보에 열심이고,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데도 불구하고) 확보한 예산으로는 당장에 성과를 낼만한 프로젝트를, 잘 조직화된 출연연을 대상으로, PBS 방식으로 발주하는 방식이 계속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4.

물론 PBS 방식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고 완전히 없앨 수도 없다.

대학을 대상으로 한 기초연구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상용화 프로젝트는 bottom-uptop-down 방식이 있는데, top-down 방식의 경우에는 PBS 방식을 해야 한다. 물론 연구자와 기업의 수요를 반영하는 bottom-up 방식의 확대는 별도로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고. 또 제한적이긴 하겠지만, 출연연 및 대학을 대상으로 한 원천기술 연구 프로젝트도 PBS 방식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PBS 프로젝트를 발주할 때는 주관기관 자격(대학, 출연연, 기업)을 명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지금까지 언급한 많은 처방들을 여기서는 긴 설명 없이 나열해본다.

 

- 출연연 인건비 중 80% 정도는 출연금으로 지급한다.

- 출연연은 기관별로 소수 핵심 분야의 R&D에만 집중하도록 예산을 배정한다.

- 출연연이 수행할 R&D 프로젝트는 5년 이상, 최소한 연 10억원 이상, 시장에서 하기 어려운 원천기술 프로젝트로 한정한다.

- 출연연에 대한 예산 배정은 출연금, 정책지정 과제(수행기관을 사전 지정하는 방식) 비중을 대폭 확대한다.

- 산업기술형 출연연은 기업 프로젝트 수주를 늘리도록 유도하고 정부 지원은 점진적으로 줄여나간다.

- 상용 개발 프로젝트의 주관기관은 (원칙적으로) 기업으로 한정한다.

- 정부부처들이 발주하는 개발 프로젝트용 예산은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한다. 물론 개발 프로젝트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개발 프로젝트 예산은 대폭 삭감하고, 나머지 중 일부는 원천기술 프로젝트(5년 이상, 대형)로 전환하도록 하면 되겠다. (상징적인 차원으로 목표 숫자를 제시한다면 40% 삭감, 30% 원천기술 개발 전환, 30% 상용개발 잔존 정도?) 이렇게 해서 절감된 예산 중 일부는 출연연 인건비(출연금)로 돌리면 되고.

- 정부부처의 개발 프로젝트 예산이 대폭 줄었으니 PBS는 그에 비례해서 줄이면 된다. 원천기술 프로젝트는 원칙적으로 해당 프로젝트 미션에 잘 맞는 출연연 (또는 대학)에 정책지정 과제로 발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앞에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역 및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연구개발 예산 중에는 사실상 보조금 성격을 띤 것이 많다. 이들에게 보조금이 필요하면 지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구개발이라는 예쁜 포장지를 씌워서 우회 지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실행계획이 완결성을 갖추려면 추진체계와 조직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내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조직 문제는 블랙홀이어서 다른 모든 논의를 삼켜버리기에 이번에는 건너뛰기로...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