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죠.
- 김민기 작사, “작은 연못”
1. Prologue
조금 과장하여 말하면, 요즘 IT산업에 관한 논의에서 ‘생태계(Ecosystem)’란 단어가 빠지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그 전부터 생태계란 말을 안 썼던 것은 아니지만,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한 2007년부터 유난히 많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아이폰 이전의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통신사업자가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플랫폼(미들웨어)을 지정해주면, 휴대폰에 이를 탑재하고 모뎀, CPU 등 하드웨어와 잘 연동되도록 묶어서 하나의 완제품으로 만들면 되었다. 콘텐츠 또한 제조업체가 신경 쓸 영역이 아니었다. 통신사업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서비스 플랫폼에서 어떤 콘텐츠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폰은 자신이 OS를 만들었고, 외부 개발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콘텐츠와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서 앱스토어에 올리도록 하였다. 애플이 이처럼 외부 개발자와 협력하여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한 것이 아이폰의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으로 지적되면서, 애플이 하드웨어·소프트웨어·콘텐츠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조성함으로써 승자가 되었다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이폰 등장 이전에는 하드웨어 완제품 기업끼리 경쟁하는 구도였는데 비해, 그 이후에는 하드웨어·운영체제(OS)·콘텐츠를 아우르는 전체 가치사슬 연합군, 즉 ‘생태계’ 간의 경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이다.
그러나 그 뒤로는 생태계라는 말이 컨버전스, 플랫폼, 스마트, 소프트 등의 경우처럼 “아무데서나” 쓰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그 의미 차이가 큰 것 같다. 심지어 그 말을 쓰는 사람조차도 자기가 어떤 맥락에서 쓰고 있는지 명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여기서는 ‘생태계’란 단어가 쓰이는 다양한 경우를 따져보고 각각의 의미, 시사점 등을 짚어 본다. 따라서 이 글은 많은 주장을 담고 있기 보다는, 생태계와 관련된 개념들을 정립함으로써 ‘생태계’와 관련된 논의 또는 정책을 전개하거나 평가함에 있어서 혼란을 줄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2. 생태계의 의미 - 가치사슬 구성기업 간의 중첩적 협력과 경쟁 관계
IT산업에서 ‘생태계’라는 단어는 콘텐츠(C)-플랫폼(P)-네트워크(N)-단말기(T)라는 가치사슬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즉, 이들 “네 가지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기업들이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맺는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들 간의 경쟁과 협력에는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1) C1+P1+N1+T1 vs. C2+P2+N2+T2
흔히 애플 생태계, 안드로이드 생태계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여기서의 ‘생태계’는 ‘서로 협력하는 가치사슬 연합군’의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속하는 하드웨어, OS, 콘텐츠 업체 간에는 서로 ‘협력’하면서, 애플 생태계에 속하는 하드웨어, OS, 콘텐츠 업체들과 ‘경쟁’하는 상황이다.
물론 안드로이드 생태계 내의 기업들이 서로 협력한다고 해서, 그들 간의 경쟁이 없다는 건 아니다. 안드로이드 생태계 내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구글과 삼성이 벌이는 신경전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참여한 제조업체들끼리도 자신의 점유율 확대를 위한 경쟁을 하고 있다.
C-P-N-T 가치사슬에는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단말기 제조업체와 이 단말기에 부품, 소재 및 SW를 제공하는 기업들도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부품, 소재, SW를 제공하는 납품업체들과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를 생태계라고 부를만하다. 한편, 납품업체 간에 일부 중복이 있기는 하지만,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 구성원과 LG전자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 구성원은 대체로 다르다. 이런 점에서 두 생태계는 경쟁하고 있는 관계이다.
(2) C vs. P vs. N vs. T
스마트폰 생태계, 스마트TV 생태계, 좀 더 포괄적으로 스마트 디바이스 생태계, IT산업 생태계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C-P-N-T라는 네 구성요소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1)과 다르다.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기업들은 서로 협력하여 스마트폰 산업(또는 IT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합치된다. 콘텐츠 없이 단말기가 발전할 수 없음은 노키아 스마트폰과 아이폰의 차이에서 잘 알 수 있다. 앱스토어라는 플랫폼이 생기면서 애플리케이션(즉, 콘텐츠)들이 엄청나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도 C-P 간의 상호 의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스마트폰 산업(또는 IT산업)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협력할 유인이 있는 각 가치사슬의 구성요소들도 생태계 내에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하는 것을 가지고 또 경쟁한다. 과거 피처폰 생태계는 네트워크 기업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면, 현재까지의 스마트폰 생태계는 SW플랫폼, 즉 운영체제(OS) 기업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많은 이들의 전망에 따르면 앞으로는 서비스 플랫폼이 주도권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생태계 구성원들이 어떻게 협력하고 경쟁하느냐에 따라 생태계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도 있고, 또는 정체, 퇴보 심지어는 멸망할 수도 있다. (작은 연못의 두 마리 붕어가 싸우다 한 마리가 죽어버리면 생태계가 붕괴되어 나머지 한 마리도 죽게 된다는, 대학생 시절에 많이 불렀던 노랫말이 생각나서 이를 서두에 옮겨 적었다.)
3. “Global" vs. "Local" 생태계의 중첩적 구조
어떤 생태계가 글로벌 생태계인지 로컬 생태계인지를 따지는 것은, 서로 경쟁 또는 협력하는 기업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데 필요하고, 정부 정책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이며, 그 정책의 적용 범위가 어디인지 등을 따지는데도 유용하다.
첫째, 글로벌 생태계는 앞의 2.에서 지적했던 두 가지 형태가 모두 나타난다.
(1)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글로벌 안드로이드 생태계와 글로벌 애플 생태계가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윈도우 생태계가 이 시장에 진입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형국이다.
(2) 글로벌 스마트폰 생태계에서 가치사슬 상의 주도권 경쟁도 나타난다. 전 세계 네트워크 사업자들이 SW플랫폼 기업들의 주도권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연합 앱스토어인 WAC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서비스 플랫폼 기업인 페이스북이 SW플랫폼 업체의 앱스토어를 견제하기 위해서 웹 플랫폼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유사한 예이다.
둘째, 하나의 생태계는 글로벌과 로컬 생태계의 형태로 중첩적으로 나타난다.
(1) 예컨대 안드로이드 및 애플 생태계 간의 경쟁을 글로벌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만, 특정 국가에서의 로컬 안드로이드 생태계와 로컬 애플 생태계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애플 생태계가 더 강력한 힘을 갖는데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안드로이드 생태계가 훨씬 강력하다.
(2) 너무나도 당연하게 로컬 스마트폰 생태계에서 가치사슬 상의 주도권 경쟁도 나타난다. 즉, 우리나라 시장에서 네트워크 사업자와 단말기기 사업자간의 주도권 경쟁, 네트워크 사업자와 플랫폼 사업자간의 갈등 등이 벌어진다. N-T간의 주도권 경쟁은, 피처폰 시대는 네트워크 사업자가 주도했다면, 스마트폰 시대에는 단말기 제조업체가 좀 더 강해졌다. 특히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이 급증한 것이 이들 기업 간의 협력, 경쟁관계의 양상을 변화시켰다. 이런 면에서, 삼성과 SK텔레콤은 글로벌 및 로컬 안드로이드 생태계 확산을 위해서는 협력할 유인이 있지만, 로컬 스마트폰 생태계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국면이다.
셋째, 가치사슬 상의 각 구성요소는 “글로벌”한 정도, “로컬”한 정도에서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단말기와 SW플랫폼은, 경쟁과 협력 관계가 주로 글로벌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개별 로컬 시장에서도 글로벌 시장과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다. 이를테면, 삼성전자 vs. 애플, 안드로이드 vs. iOS의 시장점유율이 로컬 시장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협력과 경쟁 관계는 글로벌 시장에서 정의된다는 뜻이다.
(2) 네트워크는 가장 로컬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즉, 기본적으로 각 로컬 시장에서 로컬 네트워크 사업자간의 협력과 경쟁 관계로 정의되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보다폰, 오렌지 등 글로벌 사업자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글로벌 전략에 따라 움직이지만, 기본적으로 각국의 네트워크 운영사업은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앞에서 보았듯이 로컬 네트워크 사업자들이 연대하여 글로벌 생태계에서 네트워크 사업자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노력도 하지만, 그 연대의 힘은 매우 느슨하다.
(3) 그에 비해 서비스 플랫폼과 콘텐츠는 글로벌 기업과 로컬 기업이 혼재되어 경쟁하는 양상이다. 즉, T-store, 네이버, 다음과 같은 로컬 기업들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애플 앱스토어, 구글 검색, 야후 포털 등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다. 그런데 애플, 안드로이드 앱스토어는 글로벌 생태계 관점에서 의사 결정하고, 로컬 시장의 특성과 상관없이 동일한 운영 원칙을 관철시키고 있다. 포털, 검색, SNS,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플랫폼 업체들도 로컬 시장의 규범을 일정 정도 준수하지만 여전히 글로벌 운영을 하고 있다. 예컨대 구글 코리아에 대한 규제권한을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글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 생태계 종속/참여/주도/창조
종종 우리나라가 어느 생태계에 종속되어 있다느니, 앞으로 어떤 생태계를 주도해야 하느니, 또는 어떤 생태계를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듣게 된다. 대체로 단어 자체가 그 의미를 담고 있긴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해 보자.
먼저 종속은 주도에, 참여는 창조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예컨대 스마트폰 생태계를 SW플랫폼이 ‘주도’하고 있고, 안드로이드 생태계를 구글이 ‘주도’하고 있다고 본다면 우리나라 스마트폰 기업들은 이들 두 생태계에 ‘종속’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들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스마트폰 및 안드로이드 생태계에서 우리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C-P-N 기업들이 거의 입지를 갖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글로벌 생태계에서 다른 나라 기업들에 얹혀 있는 위험한 형국이라는 지적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글로벌 생태계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C-P-N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주장은 맞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이런 당위론적인 주장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우선 네트워크는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기본적으로 로컬 플레이어이다. 물론 가입자도 많고 여러 나라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네트워크 사업자들은 우리 네트워크 사업자들 보다는 글로벌 생태계에서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KT, SKT가 네트워크 사업에서 global footprint를 획기적으로 늘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플랫폼과 콘텐츠는 다른 어느 나라와 견주어 보아도 우리나라 로컬 기업들의 경쟁력이 좋은 편이다. 그렇지만, 언어적, 문화적 강점을 지닌 미국 기업들만이 강력한 글로벌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각국의 로컬 기업들과 경쟁하고 있는 전체적인 상황에서 볼 때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네트워크 환경 개선, 클라우드 컴퓨팅 확산, 웹 대비 앱스토어의 상대적 우위 등 환경 변화를 고려할 때 미국 플랫폼과 콘텐츠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될 전망이다. 콘텐츠와 플랫폼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는 노력은 지속해야 하지만, “글로벌 콘텐츠와 플랫폼을 육성하여 세계 IT산업 생태계를 우리가 주도하자” 식의 주장은 다분히 정치적인 주장에 가깝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 성공에 흥분하기 보다는, 왜 ‘싸이월드’가 글로벌화에 실패했는지 차분히 돌아보는 게 필요하다.
이제 생태계 창조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애플과 구글은 생태계를 ‘창조’했다는 말이 어울린다. 지금 마이크로소프트는 스마트폰 및 태블릿 생태계를 창조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 디바이스가 SW플랫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스마트 기기 산업에서 글로벌 생태계를 창조해야 한다는 말은 SW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삼성전자와 인텔이 ‘타이젠’이라는 새로운 SW플랫폼을 만들고 있으니, 이 노력이 성공하면 새로운 글로벌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를 정부가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고민해야 한다.
물론 수많은 크고 작은 생태계가 창조될 수 있다. 우리 기업이 스마트폰 생태계는 창조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계속 진전되는 스마트화, 융합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주도적으로 창조할 기회는 있다. 예컨대 가전기기 경쟁력을 바탕으로 스마트홈 생태계를 만들 수 있고, IT산업과 다양한 서비스 산업의 융합을 선도함으로써 새로운 생태계를 창조할 수도 있는 것이다.
5. 생태계 관련 정책 - 산업정책 vs. 규제정책
특정 산업에 대한 정부 정책은 흔히 산업정책과 규제정책으로 나뉜다. 넓게 정의된 산업정책은 규제정책을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특정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R&D·인력양성·세금감면 등의 자금지원과, 병역특례 인력 공급, 공장입지 규제완화 등 다양한 형태의 제도적 지원을 의미한다. 한편 규제정책은 특정 산업에 대한 진입, 요금 및 행위에 대한 규제, 일반적인 독과점 규제 등을 의미한다. 콘텐츠 산업에 대한 내용 규제, 미성년자에 대한 게임 시간제한 등 사회적 규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IT산업 생태계 관점에서 본 산업정책은, 가치사슬별 구성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글로벌’ IT산업 생태계를 우리 기업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방향성이 강하다. 물론 단말기용 주요 부품이나 소프트웨어 기업에 대해 기술개발, 인력양성을 지원한다면, 국내 완성품 대기업과 중소·중견 납품기업으로 이루어진 ‘로컬’ 생태계를 보다 건강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한편 규제정책은 주로 ‘로컬’ 생태계를 대상으로 C-P-N-T 간의 협력, 경쟁 관계를 규율하고 갈등을 조정해 주는 역할이 크다. 물론 기존 사업자의 시장지배력 남용을 막아 줌으로써 혁신 기업의 등장과 시장경쟁을 촉진해서 이들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가 당연히 있다. 특히 글로벌 플랫폼 및 콘텐츠 기업들의 국내 시장에서의 경쟁사업자 배제, 우월적 지위 남용에 대한 규제는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됨은 말할 필요가 없다.
6. Epilogue - 건강한, 바람직한 생태계란 무엇인가?
“생태계를 잘 만드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할 때,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생태계의 모습은 많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특히 모든 생태계 구성원들이 골고루 다 잘 사는, 그리고 아주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런 생태계를 상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생태계는 없다. 생태계라는 말 속에는 이미 ‘생노병사’의 원칙이 들어있다. 새로운 기업이 끊임없이 탄생해서 새로운 혁신을 주도해야 하고, 과거에 융성했던 기업도 어느 시점이 되면 퇴출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런 점에서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구조조정이 없으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위적인 퇴출장벽이 있으면) 그 생태계는 문제가 심각하다. 즉, 구조조정이 없으면 특정 개체의 숫자가 지나치게 증가하여 생태계가 파괴된다.
그리고 생태계의 또 다른 원칙은 ‘적자생존’이다. 그렇다고 IT산업의 생태계를 세렝게티 초원처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자는 뜻은 아니다. 학교를 보내 공부도 시키고,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도 받게 해야 한다. 즉, 창업을 장려하는 제도, 기술개발·인력양성 지원, 일정 수준 이상의 기업에 대한 글로벌 강소기업 도약 기회 제공 등 정부가 생태계 발전을 위해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성공 여부는 개별 기업의 능력에 달려있다. 단지 ‘생존’을 목표로 하는 무차별적인 지원제도는 생태계의 발전을 막을 뿐이다. (물론 어떤 기업이 퇴출했을 때 그 기업의 구성원이었던 개개인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은, 여기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사회안전망 관점에서 필요하다.)
또한 생태계에는 항상 갈등과 경쟁이 존재한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조정하고, 어떤 규칙을 가지고 경쟁하는 게 바람직하냐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생태계는 말 그대로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곳이다. 그들이 스스로 공존의 방법을 터득하고 이를 규범화하도록 돕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하면 생태계는 자생 능력을 갖출 수 없다. 물론 탈법과 약육강식이 판치는 생태계가 되지 않도록 정부가 규범을 제시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정부가 생태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드라이브하려는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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