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IT산업을 분류할 때 가치사슬(value chain)을 따라 C(콘텐츠)-P(플랫폼)-N(네트워크)-T(터미널, 단말기기)로 나눈다. 이 중에서 최근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단말기기이다. 스마트화의 진전에 따라 전통적인 단말기기들이 스마트폰, 태블릿 PC, 스마트 TV로 거듭 나면서 우리 일상생활을 크게 바꾸고 있으며, 관련 산업의 경쟁지형도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스마트 기기를 활용한 여러 콘텐츠와 이들을 묶어서 제공하는 서비스 플랫폼에 대한 기사도 넘쳐난다.
그런데 스마트 기기를 통해 원활한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서는 좋은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네트워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크지 않다. 이는 역설적으로 정반대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첫째는, 우리나라 네트워크 수준이 앞서 가다보니 단말기기․플랫폼․콘텐츠 보급에 걸림돌로 작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에 반해 네트워크 장비 산업은 너무 취약하여 관심을 끌만한 성과도, 대표적인 기업도 없을 정도로 경쟁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먼저 네트워크 서비스의 사정을 보자. 지난 1년 사이에 우리나라 무선데이터 트래픽은 무려 13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태블릿 PC, 스마트 TV 보급으로 더욱 심화되어 앞으로 매년 데이터 트래픽이 무선은 100%, 유선은 3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결국 통신사업자들의 투자 증가로 연결되고 있다. 국내 통신사업자들의 매출액 대비 설비투자 비중이 과거에는 16-17%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20.7%로 대폭 증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트래픽이나 투자는 느는데 비해 매출액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과거 수년간 초고속인터넷 및 이동통신의 가입자당 매출액은 줄곧 하락세를 보였는데, 마침내 지난 3분기에는 작년 대비 모든 통신사업자들의 이동전화 매출액이 감소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상황이 초래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카카오톡 같이 기존 통신서비스를 대체하는 비즈니스 모델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인데, 앞으로 무선인터넷 전화가 본격화됨에 따라 이통사들의 수익기반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둘째, 소수 이용자나 특정 애플리케이션이 트래픽을 집중적으로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약 5%의 고객이 무선트래픽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상위 10개의 콘텐츠가 전체 트래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용자들이 원하는 서비스는 적절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트래픽이 폭증하는 한 아무리 설비투자를 많이 해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리고 통신사업자들은 매출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설비투자에 나설 리도 없다. 결국 트래픽을 유발하는 당사자가 그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무선 모두 소수의 대량 이용자에 대해 종량요금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러나 종량요금제는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정책이기 때문에 도입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콘텐츠 제공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플랫폼 사업자가 네트워크 사업자에게 트래픽 비용을 분담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엔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실제로 어떤 플랫폼 사업자에게 얼마만큼 부담시켜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네트워크 시장에 대한 경쟁정책도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보다 경쟁적인 시장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며 따라서 신규진입은 장려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통사들로부터 네트워크를 빌려 이통서비스를 제공하는 MVNO(가상 이통망 사업자)들이 7월부터 서비스를 개시했다. 또 직접 무선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서비스를 제공할 제4이통사업자의 선정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들 신규사업자들이 앞으로 어떤 성과를 낼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이통시장이 포화되었고 과거 5개 사업자가 3개로 구조조정 되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이들의 시장 안착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네트워크 투자는 늘리고, 소비자의 통신비 부담은 줄이면서, 신규 사업자도 이익을 낼 수 있는 묘안은 없다.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 기업들이 휴대폰, TV 등 단말기기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네트워크 장비 산업에서의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1,500여 억달러에 이르는 세계 네트워크 장비산업에서 우리나라의 점유율은 불과 3% 수준이다. 휴대폰 시장 점유율 30%과 비교하면 우리의 경쟁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기업들은 대부분 네트워크 산업에서 철수하여 중소기업 위주의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재 네트워크 장비 업체 수는 800여개에 달하지만 연간 매출 천억 원을 넘는 곳은 6개에 불과하다.
국내 시장에서 라우터 등 핵심장비는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비교적 단순한 가입자망 장비 정도가 국산화된 형편이다. 그나마 핵심부품은 대부분 수입하다 보니 화웨이 같은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에 밀려 급속하게 잠식당하고 있는 중이다.
공공기관과 기업 등 국내 대기업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보수적인 의사결정을 하다보니 결국 지나치게 외산 장비를 선호하게 되는 구매 관행도 문제다. 국내 중소기업들이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먼저 내수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데, 국내 수요가 그 기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한때는 디지털 교환기를 만드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다. 초고속인터넷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급속도로 보급하였지만, 정작 네트워크 장비 산업은 인터넷으로의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다.
그러나 최근의 데이터 트래픽 폭증 덕분에 네트워크 장비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또한 유무선 융합 등 네트워크 기술도 빠르게 바뀌고 있어 네트워크 장비의 대규모 교체도 예상된다. 우리 업체들이 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연구개발, 구매제도 개선 등 정부와 산업계가 함께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데이터 트래픽의 폭증은 우리나라 네트워크 관련 산업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적절한 정책과 기업의 노력이 없으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네트워크도,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장비 업체의 모습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 이 글의 축약본은 오늘(2011년 12월 16일) 조선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15/2011121501852.html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