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운넷 2021년 12월 17일

 

“지구는 하나다.”
노래 가사도, 인류애를 강조하는 종교 지도자의 메시지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확산세가 이 사실을 똑똑히 확인시켜주고 있다. 오미크론 변이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한 지 불과 2~3주 만에 이 새로운 변이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만큼 지구는 '좁고' '하나의 운명체'다. 

백 년 전 스페인 독감이 종식되는 데 2년여가 걸렸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시달린 지 벌써 2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국가 간 '실질적 거리'가 백 년 전보다 훨씬 줄어든 것이 코로나19 종식을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설사 한 나라의 백신 접종률이 거의 100%에 달하더라도 백신 접종률이 매우 낮은 나라에서 변이종이 발생해 다른 나라로 퍼지면 속수무책이다. 

 

코로나19를 조기에 종식시키려면 어느 나라에 살 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백신을 접종시켜야 한다는 인식은 진작부터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저소득 국가가 감당하기에 백신 가격이 너무 비싸고 또 냉동 시설 등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아직 백신 접종률이 2~3%에 머물고 있다.

코로나19 백신 가격은 국가마다 조금 다르지만, EU에서는 화이자와 모더나 일회 분 가격이 23~25달러 수준이다. 그런데 이들 백신 생산비는 일회 분에 불과 1.2달러로 알려져 있다. 이들 제약사들이 엄청난 폭리를 누리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제약사들이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기술이 특허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독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백신 특허권 유예 협의 지지부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국제사회는 작년부터 제약사들이 가지고 있는 백신 특허권을 유예(waiver)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지만 아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의 ‘무역 관련 지식특허권 협정’은 공중보건 상 필요가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특허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 특허권이 유예되면, 유예 기간 동안 해당 발명이 아예 특허 대상에서 제외하게 되고, 따라서 특허권자의 배타적인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특허는 기술혁신을 장려하기 위해서 마련한 제도이고 특허권 유예 선례도 매우 드문 편인데 이에 대해 합의가 쉽게 이루어질 리가 없다. 후진국들은 대체로 특허권 유예에 찬성했지만, 미국, EU, 영국 등이 특허권 유예가 혁신을 늦춘다는 이유로 반대해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가, 지난 5월 미국이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11월에는 EU도 다소 유연한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어떤 형태로건 특허권 행사를 제한하는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특허권 유예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특허권 유예가 실제로 백신 보급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많다. 그럼 이제 특허권 유예의 정당성과 실효성 논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살펴보자.

 

먼저, 특허 제도는 왜 존재하는가? 연구개발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은 기술혁신이 갖는 공공재적 성격 때문이다. 즉, 연구개발의 결과는 개발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내고 이를 활용해 상용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처럼 기술혁신의 성과가 개발자에게 모두 귀속되지 않고 경제 전체에 무상이나 저렴하게 파급되는 것을 외부 효과라고 한다. 외부 효과가 크면 경제 전체로서는 큰 편익을 누리지만, 개발자는 혁신의 편익을 다 가져가지 못하니 기술혁신을 열심히 할 유인이 없다. 따라서 연구개발 성과를 보호해줌으로써 더 많은 혁신을 장려할 필요성에서 만든 제도가 특허다. 

그러나 혁신의 '최적 생산'과 '최적 소비' 간에는 근본적 갈등이 존재한다. 즉 혁신을 바람직한 수준까지 “생산”하기 위해서는 특허를 통해 혁신가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혁신의 결과물을 제품으로 시장에서 판매하는 경우 얼마의 가격이 적당할까?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생산비용과 같은 수준에서 가격이 정해지고 이때 소비자 잉여가 극대화되므로 최적의 '소비'가 보장된다. 따라서 생산비용에 특허권에 대한 이윤을 더하여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소비자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리하면, 외부 효과로 말미암아 최적 수준의 혁신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특허 제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도한 보호 장치는 해당 제품 가격의 상승, 그리고 소비 감소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으므로 이 둘 간의 균형이 필요하다.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특허권 유효 논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허권 제한은 기업들에게 큰 불확실성으로 작용하여 앞으로 두고두고 새로운 약품 개발을 막을 수 있다는  한 쪽의 주장에 대해, 지금 당장에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현실이 너무나 급한데 이럴 때 말고 언제 특허권을 유예할 것이냐는 또 다른 견해가 맞서고 있다.



특허권 유예보다 가격차별 전략에 집중해야

특허권 유예가 합의되더라도 실효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먼저, 제약사가 반대할 경우 특허권 유예를 강제할 수단이 미비하다. WTO 합의는 회원국만 구속하므로 화이자·모더나 등 제약사가 개도국 기업에 기술을 지원해야 할 직접적인 의무는 없다.

둘째, 주요국의 백신 및 원료·장비 수출 규제가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예컨대 EU는 역내에서 생산된 코로나19 백신 수출 시 회원국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미국도 사실상 백신 수출을 금지 중이며, 백신의 원료·장비까지 수출 통제가 가능하다.

셋째, 최첨단 백신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시설·인력을 갖춘 국가가 거의 없어, 결국 백신 공급이 크게 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결국엔 비싼 값을 내고라도 살 용의가 있는 선진국들의 잔치로 끝날 것이다.

 

그러면 특허권도 보장하고 백신 보급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경제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안은 가격차별이다. 사실 제약업체 입장에서는 선진국에게 지금처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면 후진국에겐 생산비에 약간의 이윤만을 붙여서 팔 유인이 있다. 소득을 기준으로 한 이런 가격차별은 일반화된 마케팅 기법이다. 영어로 된 대학 교재를 미국에서는 비싸게 판매하고, 후진국에는 '국제판(International Edition)'이라는 이름으로 싸게 파는 것이 백신과 유사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화이자·모더나가 아프리카 연합 국가들에게 백신을 6~7달러에 팔았던 선례도 있는 만큼, 이들 제약사들도 국제사회의 압력에 대응하면서도 손해를 보지 않는 옵션을 기꺼이 선택할 여지가 있다. 따라서 선진국들이 백신 종식을 간절히 바란다면, 이론적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고 실효성도 논란이 많은 특허권 유예에 매달리지 말고, 저소득 국가에 대해서는 파격적으로 낮은 가격, 예컨대 2~3달러로 책정하도록 제약사를 유도하는 것이 낫겠다. 화이자·모더나는 선진국으로부터 82억 달러의 공공 연구개발 자금을 지원받았다. 공식적으로 가격차별 정책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낮은 가격도 감당하지 못할 최빈국에 대해서는 보완적으로 인도적 원조를 통해서 백신을 공급하면 된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