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21년 4월 22일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한국형 ESG 평가 지표를 개발하여 하반기에 발표하겠단다. 우리 정부는 뭐가 뜬다 싶으면 나서서 간섭하고 정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오랜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여기까지 정부가? 그것도 또 K-시리즈로? 그리고 왜 산업통상자원부가?

 

기업이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 개선 활동을 하면, "우리가 이런 저런 활동을 했습니다."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러면 이 자료를 활용하여, 투자자들과 평가기관들은 이 회사가 얼마나 ESG 개선 활동을 잘 했는지 평가한다. 기업이 경영활동 결과를 재무제표에 담아 공시하고, 신용평가기관과 애널리스트들이 이를 바탕으로 그 기업의 재무성과를 평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번에 산업부가 하겠다는 건, 기업의 ESG 성과를 평가하는 지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부가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국내외에 600여 개의 평가지표가 운용되고 있고, 운용기관마다 세부 항목과 내용이 달라 기업들의 혼란이 크기" 때문이란다.

기업의 재무적 활동을 기록하는 재무제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민간기관과 금융당국이 전세계적인 표준을 만들었다. 신용평가기관들이 이를 바탕으로 기업들에게 신용등급을 매기지만, 평가기관마다 평가항목도 다르고 평가등급도 차이가 있다. 더 더구나, 증권사들의 목표 주가는 애널리스트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이건 평가사나 증권사들의 실력 차이가 나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각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용등급이나 목표 주가가 제각각이라서 기업이나 투자자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얘기는 없다. 다양한 평가 의견은 그 회사의 여러 가지 측면을 되돌아 볼 기회를 주어서 도리어 좋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ESG 평가 지표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고 그 결과도 제각각이어서 혼란스럽다는 말이 전혀 틀린 지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기업들의 ESG 개선 활동이나 평가 자체가 워낙 초기 단계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측면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무제표처럼 표준화된 정보를 기업이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할 기초자료가 부족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세월이 지나 조금 안정이 되더라도, ESG 평가등급은 신용등급보다는 평가기관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 신용등급은 재무성과(value) 하나만을 보니까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비슷하지만, ESG 등급은 다양한 사회적 가치(values)를 반영하기 때문에 평가기관마다 중요하게 보는 기준이 다른 것이 당연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바람직하기도 하다.

이걸 정부가 나서서 동일한 평가 잣대를 제시하겠다는 것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지향하는 ESG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한편 신용등급 평가에서 보듯이 평가는 각자 기준에 따라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자료는 표준에 맞춰 작성된 재무제표다. ESG 평가를 잘 하려면 기업들이 어떤 ESG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료가 충분해야 하고, 그 자료들이 기업들끼리 비교 가능해야 한다. 여러 국제기관들과 정부 금융당국들은 기업들이 공개할 자료를 표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머지않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전망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업들은 자신들의 ESG 활동을 담은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대개 이 보고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몇몇 기준을 반영하여 작성되고 있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기업들의 ESG 활동을 파악하는데 요긴한 정보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약 100여개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지만, 이를 공시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한국거래소에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공시한 기업 수는 38개뿐이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올 1월에 ‘기업공시제도 종합 개선방안’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2030년에 모든 한국거래소 상장사를 대상으로 ESG 공개를 의무화할 예정이다. 앞으로 9년간은 상장기업들의 ESG 관련 공식자료를 (표준화되었건 아니건) 볼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ESG 정보는 투자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지, 누가 누가 착하나 경진대회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처럼 깜깜이 상황을 만들어놓고 ESG 정보가 투자에 효율적으로 반영되기를 기대하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신뢰할만한 공식자료가 없는데,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고 또 평가기관 간에 편차가 줄어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 생선이 주렁주렁 매달리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ESG 공개 의무화 시점을 멀찌감치 뒤로 잡았을 때 논리도 기업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장기업에게 정보 공개 의무는 완화해 줄 부담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식적인 자료를 공개해주면, 개별 ESG 평가기관들로부터 몰려오는 자료 요청에 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니 부담이 도리어 줄어드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그러나 이 경우 정부가 해야 할 일은 10년 가까이 뒤로 미루어놓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