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이제 ESG 투자에 관한 글을 일단락 하면서, “ESG 투자는 왜,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인가?”라는 최초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투자자, 자산운용사, 대기업 CEO 구분할 것 없이 ESG 투자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여기에 WEF(World Economic Forum) Klaus Schwab 회장을 포함한 전문가, 컨설팅 회사, 언론까지 가세하여 판을 키우고 거기서 먹을것을 찾는 형국이다. (, 하긴 이렇게 열심히 ESG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 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니까.)

그러나 다들 꿍꿍이속은 다른 것 같다. 개인 투자자들에게 ESG 펀드를 열심히 마케팅 하는 자산운용사와 연금을 관리하는 투자자의 생각과 목표가 같을 리 없고, 2019년에 Business Roundtable에서 발표한 181명의 CEO들은 또 얼마나 속으로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싶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ESG 투자를 향한 큰 흐름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익을 위해서 ESG 투자를 한다.”ESG 투자자들의 생각에 기업의 목표는 이해관계자 이익을 충족시키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주창자들은 동의하는 것인지, 이들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열심히 ESG 투자 프로모션을 하고 있는 BlackRock CEOLarry Fink가 이야기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같은 것인지, CEO들은 ESG 투자가 본격화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경영 목표, 더 나아가 기업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해관계자와 주주, 이해관계자간 이해 충돌이 발생하면 어떤 선택을 하려고 할지,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들 ESG가 좋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진지한 논의를 하려는 사람들도 용어에 대한 정의, 상대방에 대한 이해 등에서 턱없이 부족해서 컨센서스를 끌어내기 힘들다.

이런 문제의식을 안고, 기업이란 무엇이며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서 시작한다. 기업의 목적에 대해서 신고전파 경제학, Friedman, Hart & Zingales, Porter & Kramer,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등 다양한 견해를 살펴본다. 그 중에서도 최근에 화두가 되고 있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논의하고, ESG 투자와의 연관성도 언급한다

 

 

2. 기업이란 무엇인가?

 

2.1 전통적 경제 이론에서의 기업 - 블랙박스

 

전통적인 경제 이론(미시경제학)에서는 기업이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기업이란 단지 일반적으로 기술적인 관계 , 생산함수 로 해석하여, 생산요소를 투입하면 생산물이 나오는 블랙박스처럼 간주해왔고, 기껏해야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공동작업(team production)을 하는 것이 기업이라는 정도로 생각했다. 이처럼 전통적 경제 이론에서 기업의 본질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부족한 이유는,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어떻게 가격기구가 자원의 사용을 조정하는지(coordinate) 이해하는 것이었지, 실제 존재하는 기업의 내부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격 기구가 자원의 사용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소비와 생산(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를 위해서 경제 이론은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주체로서의 가계와 기업을 정의하고 있을 뿐, 실제 가계와 기업을 비슷하게 묘사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2.2 Ronald Coase(1937), “The Nature of the Firm”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1991)Coase가 쓴 개척자적인 논문 “The Nature of the Firm”은 기업이론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열었다. 그는 기업은 무엇인가? 기업은 왜 존재하는가? 기업의 크기(규모와 범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라는 매우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그에 따르면, 기업의 본질은 가격 기구의 기능을 대체하는 데 있다. , 시장에서는 가격 기구가 자원의 배분(이동)을 결정하는데 비해, 기업 내부에서는 경영자가 생산량을 결정하고 자원 배분을 조정(coordination)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직원의 부서 이동은 자기의 월급(요소비용) 변화 때문이 아니라 경영자의 지시 때문이다. , 기업 내부에서는 시장에서의 거래가 없어지고 기업가(경영자)가 생산을 관리 감독한다. 따라서 그는 기업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부분적으로라도 기업이 가격 기구를 대체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만약 생산이 가격 변화에 의해 통제, 조정될 수 있다면, 어떤 조직이 없어도 생산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 기업과 같은 조직이 존재하는가? 또는 필요한가? 그리고 어떤 때는 가격 기구에 의해 조정(자원배분)이 이루어지고 또 어떤 때는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는가? 이런 질문들이 곧 기업의 존재 이유로 연결된다.

그럼 기업은 왜 존재하는가? 원론적으로는 시장을 통해서 생산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생산을 책임지는 관리자(entrepreneur)가 매일 반복적으로 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근로자CEO에서 수위까지를 시장에서 시장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 기업가는 개개의 필요한 거래를 위해서 시장(spot market)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장을 이용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 필요한 생산요소의 품질과 가격에 대한 정보를 취득해야 하고, 구매 조건을 협상하는데 드는 비용 등이 그것인데, 이를 통칭하여 거래비용(transaction costs)이라고 한다. 물론 기업 내에서 생산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정보수집, 계약조건 협상 등의 비용이 든다. Coase에 따르면, 기업 이용에 따른 거래비용과 시장 이용에 따른 거래비용을 비교하여, 전자가 후자보다 적으면 해당 거래는 기업 내부에서 이루어지면서 시장 기구를 대체한다. 일반적으로 기업 내에서의 계약은 대체로 장기 계약 성격을 띠고, 장기 계약에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들을 사전적으로 담을 수는 없기 때문에, 계약에는 기본적인 내용만을 담고 계약에 의해 기업가 또는 상급자가 생산요소를 배치,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러한 장기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시장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 거래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가격기구에서의 거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가격 이외의 요인에 의해서 행동이 통제(voluntary non-price constraint)되는 계약이 계약 당사자들에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 계약을 맺지 않고 가격(시장)기구에서의 거래에 의존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약의 존재 자체가, 그 결과가 시장에서의 거래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업 규모가 너무 커지면 기업가의 역량에 한계가 있으므로 자원배분 상의 실수가 늘어나고, 또 정보전달이 잘 안되고 조정에도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이 모든 요인들이 기업을 이용하는 비용을 증가시켜서 결국 기업 규모를 더 이상 키우지 못하게 된다.

 

2.3 “계약의 집합체(nexus of contracts)로서의 기업

 

Coase의 기업이론은 1970-80년대에 Demsetz, Jensen, Fama 등에 의해 진화되었는데, 기업이론에서는 대체로 기업을 계약의 집합체로 정의하고 있다. 공동생산(team production)을 위해 모인 이해관계자들은 각자의 역할을 정의한 계약을 서로 체결한다. 그런데 공동생산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그 성과를 기여분에 따라 나누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기여도를 측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개개인은 당초 약속한 생산요소를 제공하지 않을 인센티브가 있다. (근로자의 경우 게으름을 피우고, 납품업자의 경우 불량품을 납품하는 등) 약속을 어김으로써 누리는 편익은 오롯이 자기 혼자서 누리는데 비해, 그로 인해 공동생산에 차질이 생겨서 입는 손실은 참여자 모두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생산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모니터링을 담당해야 한다. 그럼 이 역할을 누가 담당하는 것이 좋을까?

여기서 잔여재산청구권자(residual claimant)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잔여재산청구권자는 구성원 모니터링을 담당하며, 다른 모든 구성원과 계약할 권리 (모든 구성원들끼리 계약을 맺을 필요가 없음), 계약 내용을 재협상할 권리, 계약을 해지할 (구성원을 해고할) 권리 다른 구성원 동의를 받지 않고도 잔여재산청구권(residual claim)을 매각할 권리 등을 갖는다. 그러면 잔여재산청구권자는 누구일까? 기업의 생산 활동에 참여한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사전에 약속한 금액(임금, 지대·임차료, 이자, 물품 대금)을 지급하지만(fixed payoff), 주주들은 매출액에서 이들 이해관계자들에게 지불할 금액을 다 지불하고 남는 금액(residual)을 이윤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잔여재산청구권자가 된다. 이처럼 주주는 다른 구성원들과는 달리 회사 경영성과에 따라 자신의 몫이 크게 변화하기 때문에 다른 구성원들을 모니터링하고 성과를 내도록 독려할 인센티브가 있다. 이처럼 모든 기업 구성원 중 주주가 갖는 특수한 성격과 지위 때문에 주주는 주주총회 및 이사회를 통해서 경영자에 대한 임면권과 주요 의사결정권을 갖게 된다.

물론 다른 이해관계자들도 파산 같은 심각한 위험에 처하면 약속한 금액을 받지 못할 수 있고, 또 계약에 따라서는 이윤이 많이 발생할 경우에는 그 중 일부를 받을 수 있는 upside potential도 있다. 이처럼 기업 활동에 참여에 따른 보상액의 변동 폭이 클수록 그 이해관계자는 잔여재산 분배 과정에 일정한 정도 참여할 근거가 생긴다. 대표적으로 근로자들은 자신의 금전적·인적 자산이 기업 성과에 상당히 연동되며, 따라서 노조를 통한 협상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채권을 보유한 은행이 기업 경영 활동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일정부분 간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보상액(이윤)이 전적으로 사후적인 기업 성과에 달려있고, 파산에 이르면 투자금도 모두 잃게 된다는 점에서 주주들과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잔여재산청구권은 큰 차이가 있다.

 

확실한 대주주가 있는 기업에서는 그 대주주가 직접 경영하거나 전문경영인을 임명하여 경영을 하게 할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앞에서 묘사한 상황과 잘 일치한다. 그런데 특정 대주주가 없이 주식 소유가 분산된 오늘날의 대기업에서는 경영자(CEO)가 거의 전적으로 경영을 책임진다. 이 경우에 CEO는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기업을 경영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CEO가 주주총회에서 선임되고 또 주주의 위임을 받아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이사회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기업이론에서 CEO는 주주들의 대리인(agent)이라고 본다. 따라서 CEO는 주주의 이익, 즉 이윤을 극대화할 의무가 있으며, 만약 이를 벗어나 자신의 선호에 따라서 행동하면 그만큼 기업가치가 줄어든다. CEO가 이처럼 기업가치 극대화를 위해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기업가치 감소분을 대리인 비용(agency costs)이라고 하고, 어떻게 하면 대리인 비용을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어떤 이들은 주식회사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계약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소유주라는 개념이 없으며, 더욱이 오늘날처럼 주식 소유가 완전히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기업 소유주라는 표현은 실체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CEO가 주주의 대리인이라거나 CEO가 주주 이익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건 틀린 말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하겠지만, 기업이론에서는 일반적 주주=소유주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주주가 기업 소유주냐는 논쟁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CEO 임면권을 포함한 주요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느냐?”, 즉 기업지배구조이고, 그 점에서 주주가 다른 이해관계자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 본질이다.)

 

 

3.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3.1 “기업의 목적이란 말이 맞는가?

 

앞의 문단은 자연스럽게 기업의 목적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주로 당위론적 관점에서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기업의 목적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해서 실제로 기업이 그렇게 움직이게 될 수 있다면 이런 토론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컨센서스를 만들기 위해서 이런 토론은 필요하고, 컨센서스가 이루어지면 기업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제도와 사회적 규범을 바꿔 갈 수 있다. 그러나 기업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한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바뀐다면,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제약을 가한 것이지 기업의 목적을 바꾼 것은 아니다. 수많은 ESG 관련 규제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이 기업의 행동을 바꾸긴 했지만, 기업의 목적을 바꾼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기업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목적을 못 바꾼다고 해서 행동을 바꾸는 것이 가치가 없다는 건 전혀 아니다. 결과가 중요하니까. 그러나 그런 규제는 기업들에게 제약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요건만을 충족시키려고 하지, 그 이상을 추구하는 행동은 기업 목적 이윤? - 달성에 어긋난다.)

따라서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려면 기업의 목적이 기업 관계자들의 인센티브에 합치해야 할 것이고, 그래야 누가 간섭하지 않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건, 그것이 인센티브에 합치(incentive compatible)한지를 따지는 것이 제도의 영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기업의 목적 또는 행동 방향에 대해서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물론 규제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정부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기업이 움직이도록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것이 더 좋은 대안이다.

이쯤에서 이런 반박이 나올 법하다. “경제학자들은 맨날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라고 이야기해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윤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향으로 규제를 도입하려 하면 이는 이윤 극대화라는 기업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목청 높이지 않았는가?”라고. 그러나 바로 이어서 살펴보듯이 이러한 반박은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3.2 경제학에서의 이윤(주주가치) 극대화 가정

 

블로그 (2), (6)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경제학은 모든 경제주체는 자기 이기심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즉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합리성의 가정(rationality assumption)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기업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전제한다. (또는 좀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믿는다.) 또한 소비자들과 기업이 이처럼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기업-소비자 간 시장거래를 통해 사회 후생(사회적 잉여) 극대화라는 사회적 목표도 달성한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이 전제 또는 가정이 틀린 경우도 적지 않다. 기업가/경영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윤 극대화를 못하는 경우도 있고, 소유주가 이윤 극대화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으며, 경영자를 포함한 기업 참여자들 중 누군가가 이윤 극대화에 합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업에서 대부분의 행동은 이윤 극대화에 합치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한다는 전제 하에 그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거나 정책을 펴도 크게 현실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이처럼, 경제학에서는 기업의 목적이 이윤 극대화여야 한다고 목청 높여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움직인다고 보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 분석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이윤 극대화는 당위론적 목표가 아니라 인센티브에 합치하는 행동 방식이다. 물론 사후적으로 당사자들의 계약(정관, 이사회 규정, 경영자 보상 등)이나 법·제도가 기업 목적=이윤 극대화를 뒷받침하도록 강화되었다는 사실은 함께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이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막는 법규나 행동을 대체로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 극대화여야 한다고 당위론적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면서 이런 법규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원론적으로 정부 개입은 항상 자원배분에 뭔가 왜곡을 가져와서 시장에서 달성할 수 있는 효율성에 해가 된다. 이를테면 정부가 소득세를 부과하면 근로자들의 근로 시간을 줄이고, 특정 재화에 간접세를 부과하면 해당 재화의 생산과 소비를 감소시켜 소비자 후생 감소(deadweight loss)가 발생한다. 그러나 완전한 시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에, 효율성 감소에 따른 비용(deadweight loss)과 정부 개입에 따른 사회적 편익을 비교하여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면, 정부 개입을 막무가내 식으로 반대하는 경제학자들은 극소수이다.

둘째, 만약 기업으로 하여금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자원을 쓰도록 사회단체나 이해관계자들이 압력을 가하고 CEO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기업 자원을 배분한다면, 이는 마치 정부가 법적 근거 없이 세금을 떼어가는 것과 똑같다. 이런 상황은 이윤 감소보다는 시장을 통한 자원배분이라는 자본주의 근본 원칙이 무너진다는 점에서 경제학이 우려를 표시하는 것이다.

셋째,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측면에서 경제학자들이 기업의 이윤을 줄이는 움직임에 반대하면, 사실 그들의 반대가 이윤 감소보다는 효율성 감소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기업이 주주 이익만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고 옹호하느냐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종합하면, 경제학에서 기업이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고 당위론적 주장을 펴지는 않았다. 다만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의 합리적 행동의 결과이며, 따라서 이를 허용, 장려하는 것이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주장하다 보니, 경제학이 이윤 극대화를 기업의 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된 측면이 있다.

 

3.3 Friedman: 그가 한 말, 그가 하지 않은 말, 그리고 평가

 

대부분 경제학자들이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주체라는 정도의 온건한견해를 피력한데 비해, 노벨 경제학상(1976)을 수상하고 시카고 학파를 이끈 Milton Friedman은 훨씬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70The New York Times Magazine에 기고한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에서 기업에게 이윤 극대화 이외의 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글은 지난 수십 년간 기업의 목적에 관한 연구나 실제 기업 경영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최근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바람이 불면서 그의 주장은 폐기되어야 할 대상으로 비판받고 심지어는 조롱의 대상이 될 정도가 되었다. 그의 글은 주주 자본주의 옹호자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옹호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옹호론자인 Alex Edmans가 말했듯이, “프리드먼의 글은 잘못 인용되고 잘못 이해되고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은 심지어 제목 이외에는 읽지도 않고 인용했을 것이다. 그들은 제목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프리드먼의 입장을 말해주기 때문에 본문을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 기업은 소비자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근로자에게는 저임금을 지불하며 환경을 오염시켜가면서라도 이윤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그러나 프리드먼은 전혀 기업이 이해관계자를 착취하는 행동을 옹호하지 않았다.”

 

(1) 그럼 프리드먼이 주장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기업(business)이 사회적 책임을 갖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사람(people)만이 책임을 진다. 물론 기업은 법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상적인 책임을 진다고 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업 소유주 또는 경영자가 그러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 주장을 확장하면, 주주, 경영자, 근로자 등은 기업에서 번 돈으로 개인 자격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사회적 책임 활동(기부, 봉사 등)을 수행하면 된다.

둘째, 경영자는 기업의 피고용인이고 그 기업은 주주들이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경영자는 주주들에 의해 임명된 대리인(agent)으로서 주주 이익, 즉 이윤 극대화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업은 법률에 규정되고 윤리적 관습으로 체화된 사회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셋째, 만약 경영자가 법에서 정한 것 이상으로 사회적 책임을 위해 활동한다면, 이는 자신을 고용한 주주 이익에 합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인플레이션을 줄이려는 정부 방침에 따라 가격인상을 억제한다거나, 법에서 정한 수준 이상으로 오염을 막기 위해 지출한 것, 빈곤 퇴치에 기여하기 위해 적임자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실업자를 고용하는 것, 이 모든 행동들은 경영자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돈을 쓰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돈을 활용해서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원래 정부가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경영자는 세금을 걷어 자신이 어디에 쓸지를 결정하는 정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처럼 기업 내부의 의사결정이 정치적 의사결정화 하면, 시장기구가 아닌 정치적 메커니즘이 자원배분을 하는 셈이니, 시장경제 체제의 장점이 사라진다. 프리드먼은 기업이 경제적 가치(이윤)를 열심히 추구하면 소비자, 노동자, 납품 기업의 후생 같은 사회적 가치 창출에 저절로 기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밖의 사회적 목표는 기업이 아닌 정부가 별도의 정치적 프로세스를 통해서 해결함으로써 시장과 정부의 영역을 분리할 것을 촉구한다.

넷째, 시장은 만장일치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 자유 시장에서는 모든 거래는 관계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거래와 협력을 통해서 모든 참여자들이 이익을 보지 않으면 그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과 거래 내에서, 참여자들이 함께 누리는 공유 가치와 개인의 책임 이외에 사회적 책임이란 개념은 존재할 여지가 없다. 그에 비해 정치적 메커니즘은 다수결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 개개인은 특정 사회적 이슈에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다수결 원칙에 따라 내려진 결정에 따라야 한다. 물론 시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당연히 다수결에 기반한 정치적 결정이 필요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사회적 책임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거의 모든 활동이 정치 영역화 할 것을 우려하였다.

다섯째,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기업의 장기적 이익에 합치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조그마한 지역사회에 대기업이 존재하는 경우에, 그 지역사회에 여러 가지 기여를 하는 것이 좋은 노동자를 채용하고, 그들이 파업이나 태업 등 행동을 줄일 수 있는 등 바람직한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경영자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발언을 남발하는 것은, 이윤추구가 사악하고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외부의 힘에 의해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널리 퍼트리고 기정사실화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프리드먼은 경고한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는 기업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행동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CSR이란 용어를 쓰는 것 자체를 경계한다.

 

(2) 프리드먼이 주장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 지난 수십 년 사이 자본시장의 단기 실적주의가 심화되었다. 기업의 분기 실적에 따라 주가가 요동치고, 그러다 보니 경영진들이 단기 이윤 극대화에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폐해가 50년 전에 주주 지상주의(shareholder supremacy)”를 역설한 프리드먼 때문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프리드먼이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이는 당연히 그 기업의 장기적인 이윤 극대화(=주주가치 극대화)를 뜻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블로그 (6)을 참조할 것) 프리드먼의 주장이 장기적인 이윤 극대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기업의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경영자들이 이해관계자들의 이익도 챙기는 행동이 주주 가치 극대화와 합치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둘째, 첫 번째 결론은 자연스럽게 프리드먼이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무시하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그는 기업들이 법률에 규정되고 윤리적 관습으로 체화된 사회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물론 수많은 기업들이 이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을 해왔고,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를 불러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게 프리드먼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윤 극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선전전에 불과하다.) 나아가 실제로 이해관계자를 챙기는 게 이익인 경우가 있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셋째, 프리드먼은 몰염치하게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경영자들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종종 그의 이론이 경영자의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했다는 식으로 오해받고 있으나, 그는 도리어 경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대리인 문제를 경계했다.

결론적으로, 프리드먼은 이해관계자 이익을 챙기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기업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주주들에 의해 그런 결정이 내려져야 하고, 그 이외에는 개인들이 자신의 자원(시간과 돈)을 써야 할 영역이지, 다른 사람(경영자)이 주주에게 이윤 극대화 이외의 목적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기업이 모든 관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계약의 집합체이고, 따라서 한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에게 손해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프리드먼의 주장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3) 프리드먼 주장의 전제(가정) 및 평가

경제학은 일정한 가정을 바탕으로 이론이나 주장을 전개하는 학문이다. 프리드먼의 1970년 기고문이 엄밀한 학술논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주장이 몇몇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의 가정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비판하면 속은 후련할지 모르지만, 어떤 조건 하에서 그의 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또는 없는지), 또 그 가정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또는 비현실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유용한 시사점을 찾는 방법이다.

첫째, 프리드먼은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하면 주주들이 자선활동 등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데 그 돈을 쓰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프리드먼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사회적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기업이 개인(주주)보다 더 잘 할 이유가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개인보다 기업이 특정 사회문제 해결을 더 잘할 수 있다면, 주주들보다는 기업에게 이 활동을 맡기는 것이 낫다. 이를테면 기업이 아예 환경오염을 안 시키는 것이 환경오염을 시킨 후에 주주가 환경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따라서 프리드먼의 경고는 기업이 단순한 현금 기부로 생색내느라 이윤을 축내지 말고 이 돈을 주주에게 나누어주라는 뜻이고, 정부나 사회단체에 대해서도 기업에게 이런 활동을 많이 하라고 압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특정 기업이 특정 사회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에는 기업으로 하여금 이러한 사회적 가치 창출에 기여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외부효과 문제가 없거나 정부가 세금이나 규제를 통해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 물론 프리드먼은 이 글에서 외부효과 문제를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기업들이 정부의 법률과 규제를 준수한다고 전제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외부효과 문제가 없거나 있더라도 해결된 상태를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이 일으킨 외부효과 예컨대 탄소 배출 에 대해서 세금 부과를 통해서 확실하게 해결한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규제는 세금보다 집행하기 훨씬 어렵다. 예컨대 환경이나 사회문제에 관해서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려고 할 때, 정량적인 기준 예컨대 오염물질 배출 허용치, 최저임금 등 - 을 제시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지만, 정성적인 이슈들을 규제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프리드먼의 전제와는 달리 실제로는 기업들이 고분고분 규제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규제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형편이다. 내노라 하는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환경, 소비자 보호 의무를 아예 무시하고 은폐했던 사례들은 수없이 많고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영자들에게 이윤 극대화만을 의무화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셋째, 프리드먼은 허위, 사기가 없는 자유경쟁 시장을 전제하고 있다. 덧붙여서 프리드먼은 그의 유명한 저서 Capitalism and Freedom(1962)에서 완전경쟁 시장 참여자들은 거래조건을 바꿀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도 없지만, 독점 기업들은 독점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힘을 사회적 목적에 사용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독과점 기업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따라서 독과점 기업에게는 기업지배구조 관점에서 경영자 및 이사회에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감독할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넷째, 프리드먼의 주장은 기업 참여자들 간의 계약이 완벽해서 모든 발생 가능한 상황에 대한 대비가 이루어진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약은 항상 불완전하다. 예컨대 주주를 제외한 참여자들에게는 어느 경우건 사전에 약속한 금액(fixed payoff)을 지불하는 것이 계약의 핵심 내용이지만, 실제로 기업이 큰 어려움에 처하면 이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고, 이를 만회할 완벽한 보험을 가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할진대, 참여자들의 몫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처럼 계약이 완벽하지 않은 경우에는 주주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해관계자들도 기업의 결정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경우에는 주주가치 극대화가 곧 기업가치(=모든 이해관계자 가치) 극대화를 의미하지 않고, 따라서 경영자들은 주주가치가 아니라 기업가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계약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이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당장에 다른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계약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주주가 잔여재산청구권자(residual claimant)가 되고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주식회사가 사실상 거의 유일한 기업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여자들이 여전히 자발적으로 주식회사 형태 예컨대 협동조합이 아니라 - 에 동의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 기업의 주주가치 극대화 행위가 현실적으로 용납되는 범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이윤추구는 용납될 수는 없다. , 주식회사 형태의 자발적 계약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현 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계약 당사자의 자발성이 보장될 정도로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당위적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양면적이다. 이런 점에서 종종 발견되는 기업들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내용이, 교조적으로 프리드먼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무조건 그를 비판하는 행동이 얼마나 무식하거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프리드먼의 전제 조건이 대체로 충족되는 상황에서는 기업 경영자는 이윤 극대화에만 신경을 써도 괜찮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 조건이 심각하게 위반되는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기업이 사회 문제 해결에 나설 필요가 있고, 기업이 그렇게 하도록 법규나 인센티브 제도를 갖출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도 이런 맥락에서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많은 규정들은 도입되어 있다.)

 

(4) 마무리

MIT 교수를 지내고 노벨 경제학상(1970)을 수상한 경제학자 Paul Samuelson은 프리드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고기를 장거리 운송할 때 싱싱하게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 수조에 장어를 집어넣는다. 경제학계에서는 프리드먼이 장어 같은 존재다.

시카고 학파의 탄생 자체가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기존 주류 경제학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이기는 했지만, 그중에서도 프리드먼은 논쟁적인 주장을 선명하게 펼치고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누구와라도 토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학자가 초근초근 따져 물으면, 논쟁을 피할 수는 없고 맞서서 깨지기도 하고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를 보강하는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장어가 다른 물고기들을 살려내는 훌륭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물고기 입장에서는 장어가 참 미울 것이다. 그 자신이 대가이지만 프리드먼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새무엘슨에게도 프리드먼은 피하고 싶은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다.

프리드먼의 글은 1970년 당시에도 칼날을 날카롭게 세운 주장이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니 뭐니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을 흔드는데 동조하거나 앞장서는 경영자들이 그의 눈에 너무 못마땅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의 글이 학술 논문 형태로 학술지에 실렸다면 학자들 간에 진지한 토론 대상은 됐겠지만 그렇게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비현실적 가정을 바탕으로 그의 주장이 전개되었지만, 원래 경제학에서는 일단 추상화된 현실을 가정하여 이론을 정립하고, 그 가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완화하면 어떤 이론적, 실무적 시사점이 생기는지 따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별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가하게학자들과 공허한 토론을 하고 싶지는 않았고, 경영자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기업이 목적이 무엇인지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주장이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는 추가적인 고려와 수정이 필요하다. 특히 지난 50년 사이에 자본주의의 많은 문제점이 노정된 상황을 감안하면 해석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그러나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기업이 이윤 이외에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발적 계약을 기초로 한 기업에서 이 결정이 주주에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강요된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자원배분을 시장이 아닌 정치적 프로세스에 의해 결정하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싸움은 분명 프리드먼이 시작한 것이 맞다. 학술지가 아닌 언론에 그의 글을 발표하면서 프리드먼 정리(Friedman Theorem)”가 아니라 프리드먼 주의(Friedman Doctrine)”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필요한 것은 프리드먼 주의에 대한 쌍방의 끝없는 무책임한 싸움이 아니라, 언제 그의 주장이 성립하고 언제 성립하지 않는지를 따지는 프리드먼 정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다.

 

3.4 “기업의 목적은 주주 후생(Shareholder Welfare) 극대화이다.” - Hart & Zingales

 

Hart & Zingales는 최근에 학술 논문(2017)일반인을 위한 글(2020)을 통해서 기업의 목적은 주주 가치(이윤, 기업가치) 극대화가 아니라 주주 후생 극대화라고 주장하였다. (Oliver Hart도 노벨 경제학상(2016) 수상자이다.) 그들의 주장은 바로 앞에서 살펴 본 프리드먼의 전제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몇몇 경우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앞에서 언급한 프리드먼의 첫째 전제 조건은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업이 주주 개인보다 상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많은 사회 문제 해결에서 단순히 돈으로 기여할 방법 밖에 없는 주주보다는 기업이 더 우위를 갖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환경 문제를 걱정하는 주주라면 이미 오염된 환경을 개선하는데 개인적으로 기부할 것이 아니라, 기업으로 하여금 환경오염을 덜 시키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기업은 이윤 극대화에만 신경 쓰고 사회 문제는 개인과 정부에게 맡겨야 한다는 프리드먼의 주장과는 달리, 기업 경영과 사회 문제가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프리드먼의 둘째 전제 조건은, 기업이 유발한 외부효과는 정부가 개입해서 세금이나 규제를 통해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데, 앞에서 보았듯이 정부는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제 외부효과를 유발한 기업이 나 몰라라 하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든 기업이 나서서 문제 해결에 기여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Hart & Zingales는 이처럼 기업이 특정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를 주주들이 희망하는 상황이 되면, , 프리드먼의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이 되면 경영자들은 더 이상 이윤(주주 가치) 극대화가 아니라 주주 후생 극대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했던 이유는, 이윤이 잔여재산청구권자(residual claimant)인 주주의 몫이고 따라서 주주가 이를 극대화하기를 원한다는 합리성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주주는 원래 자신의 효용(후생)을 극대화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이윤은 효용 함수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이다. 프리드먼 모델에서는 기업으로부터는 이윤 이외에 효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없었으나, 이제는 주주가 관심을 갖게 된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효용에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주주 가치 극대화가 아니라 주주 효용(후생)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논리의 확장이다.

Hart & Zingales 이론은 프리드먼의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완화한 것을 제외하면 프리드먼의 이론과 기본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특히 기업을 생산 활동 참가자들 간의 자발적 계약의 집합체로 보고, 여기서 고정 금액을 보장받는 다른 참여자들과 달리 주주는 잔여재산청구권과 주요 의사결정권을 가진 주체가 된다. 따라서 주주가 임명한 경영자는 주주 이익을 위해서 기업을 경영해야 하는데, 그들의 모형에서 주주 이익은 곧 주주 후생으로 표시된다.

기존 경제학 이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프리드먼의 주장이 Hart & Zingales의 모형으로 확장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형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많은 난점이 있다. 한 명의 주주라면 모를까 현대 대기업처럼 분산된 소유 구조에서 수많은 주주들이 있고 또 이들은 서로 다른 선호 체계(효용함수)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선호를 조율하여 계약을 체결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며, 투표를 통해서 의사결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 일일이 어젠다를 정하고 투표를 하는 것이 매우 번거로운 일이 될 뿐 아니라, 어떤 투표 시스템도 주주들의 복잡한 선호체계를 잘 종합할 수 없다는 이론적 난점도 있다. 그래서 Fama는 실행 상의 난점과 높은 비용을 고려할 때 주주 후생 극대화보다는 차선책으로 한 차원에서만 의사결정을 해도 되는 주주 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공교롭게 Fama 또한 노벨 경제학상(2013) 수상자다.) 그러나 Hart & Zingales는 투표는 중요한 문제로만 국한함으로써 투표 횟수를 줄일 수 있고, 투표 제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주주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주주 가치 극대화에서 주주 후생 극대화로의 변화는 단순한 용어 변화처럼 보이지만, 만약 이러한 변화에 대한 컨센서스가 이루어진다면 이윤 극대화라는 기존의 프리드먼의 주장을 대체할 새로운 이론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주주 의견을 반영하는 의사결정 과정에도 큰 변화가 올 수 있다. ESG 투자 및 ESG 경영으로의 흐름 변화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꼭 Hart & Zingales의 모형이 아니더라도, 경영자들이 어떻게 주주의 선호를 파악하고 이를 경영에 실제로 반영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3.5 Porter의 공유가치 창출(CSV, Creating Shared Value) - 기업이론이 아닌 경영전략일 뿐

 

기업의 목적에 대해 논의할 때 Porter의 공유가치 창출(CSV) 이론이 포함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Porter & KramerHBR(2011)에 게재한 논문에서, 그들은 이제 기업의 목적이 공유가치 창출로 바뀌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PorterCSV 이론에 대해서는 블로그 (5) 전체에 걸쳐서 논의하였으므로 이를 참조할 것)

 

          “기업의 목적은 단지 이윤 그 자체가 아니라, 공유가치 창출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모든 이윤이 똑같지는 않다. 물론 편협하고 단기 실적에 연연하는 자본시장이나 대부분의 경영 이론에서는 이런 생각이 사라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목적을 포용하는 이윤이 더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기업과 사회의 번영이 선순환을 만들고, 따라서 지속가능한 이윤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공유가치 창출은 오늘날의 기업 활동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지속가능하다. 공유가치는 기업들이 옳은이윤사회 편익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이윤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물론 자본시장은 끊임없이 사회적 니즈를 희생시켜가면서라도 이윤을 거두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윤은 지속가능하지 못하고 더 많은 기회를 잃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 인용문을 보면 Porter & KramerCSV를 강조하는 취지가 구구절절이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처럼 가면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착한 자본주의, 사회적 가치를 수용하는 자본주의, 유지 가능한 자본주의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CSV를 해야 하고, (기업들이 창의적으로 열심히 하기만 하면) 그런 길들이 열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에게 이런 호소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앞뒤 맥락으로 보면 기업들에게 이렇게 바뀌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개별 기업이 잘 하기만 하면 CSV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또 기업이 (또는 경영자가) 기업의 목적을 이윤추구에서 CSV 추구로 바꾸겠다고 해서 바뀌는 것인가?

Porter & Kramer는 이윤 증대를 가져오면서도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전략과 실례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Porter가 언급한 예들은 적어도 아직은 예외적이고 일화적(anecdotal)인 케이스이다. 여전히, 특히 단기적으로는,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대부분의 활동은 비용 증가를 수반한다. 물론 아주 장기적으로 CSV가 전반적인 기업 활동에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면 기술 진보를 통해서 화석연료보다 대체 에너지가 더 비용이 낮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까지 이슈를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주주가 그렇게까지 장기적으로 볼 의지나 인센티브가 있느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 지점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그들은 현 자본주의의 문제가 좁은 시각에서 단기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시장때문이라고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시장이 이렇다고 지적하고는, Porter & Kramer는 단기 이윤에 매몰된 주주들의 이익에 반해서 기업 경영자들이 CSV를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우리는 이 글에서 지금까지 기업의 본질과 목적을 이야기하면서 자율적 계약의 집합체로서의 기업, 그 계약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주, 그리고 주주의 대리인으로서의 경영자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살펴보았다. 이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기업의 목적은 주주의 인센티브(선호 체계)가 어떻게 설정되어 있느냐, 그리고 그러한 인센티브가 경영자를 통해서 실제로 어떻게 실현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냐는 당위론적 접근이 아무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단순한 구호로 그치지 않으려면 실제로 그 목적이 달성되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PorterCSV가 기업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당위론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주주의 인센티브를 CSV와 합치하도록 어떻게 조정(align)할 것인지 주주-경영자 간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align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주주가 (단기)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데도 불구하고, 경영자는 CSV를 열심히 추구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아무 근거 없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마저도 Porter의 논리를 따라가면, CSV(이윤+사회적 가치)를 달성할 수 있는 기업은 예외적으로 CSV 활동을 잘 하는 몇몇 기업일 뿐이고, 산업 전반에 걸쳐 확산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전략을 잘 짜고 실행을 잘 하는 몇몇 기업들만이 초과이윤을 올리는 것처럼, CSV를 통해 차별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는 몇몇 기업들만이 CSV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PorterCSVCSV가 기업의 목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앞서, 기업 이론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냥 사회적 가치 창출을 통한 이윤 증대 전략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4.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

 

기업의 목적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기업 이론에서 갑자기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되었다. 먼저 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최근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는지 배경을 알아본다. 그리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다양한 정의를 살펴봄으로써, 많은 이들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는, 이러한 다양한 정의에 따른 문제점을 감안하면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이론이나 실행 상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등을 검토한다.

 

4.1 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인가? - “고장 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제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강력히 전파하고 있는 WEFKlaus Schwab 회장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새로운 주류 모델로 확실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요즘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말은 모든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소리가 되었다. 최근 2-3년간 주주가치 극대화에 대한 비판이 압도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큰 압력을 느끼던 기업 경영자들에게 모든 이해관계자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겠다는 다짐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기업이 이해관계자의 이익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업을 영위해 왔던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기업들은 당연히 법과 윤리적·도덕적 관습에 체화된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면서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도록 규율되어 왔다. 물론 아주 비도덕적인 행동(practice)을 일삼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기업들이 적지 않았으나 대체로 이런 일탈 행동은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부분 기업들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 당연히 소비자 가치 창출, 우수 인력 확보, 질 좋은 납품 기업 유지를 추구해왔다. 불량 제품을 생산하거나 노동력 및 납품 기업을 착취하는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이익을 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장기적으로 유지 가능한 체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지난 20-30년간 발생한 환경 문제 및 사회 이슈들은 그 동안의 규범이나 관행에 오랜 기간 익숙했던 기업들에게 매우 낯선 것이었다. 기업들은 공정무역, 납품 기업의 노동 조건, 양성 평등, 다양한 성정체성 배려, 생명윤리, 고객정보 보호 등 이슈를 다루는데 서툴렀고, 이런 이슈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기업이 큰 위기를 맞는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특히 국제 금융 위기는 금융 기업들의 탐욕과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인식시켜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난 수십 년 간 주주가치 극대화 패러다임에 익숙해진 기업들은 창출한 부를 다른 이해관계자들은 배제한 채 주주들에게 몰아주는데 골몰해 온 것이 사실이다. 1997년에 Business Roundtable기업의 목적은 소유주에게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당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본 시장은 점점 단기 실적주의가 심화되었고, 경영진들은 이에 맞춰 단기 이윤 극대화에 역량을 집중하였다. 주주 가치를 극대화한 대가로 경영자들에게는 주가에 연동된 천문학적 성과급이 주어졌다. 그에 비해 중산층 소득은 정체되어서 소득 및 자산 격차가 커졌고, 생산성 증가는 둔화되었으며, 경제 전체의 투자 수익률은 하락하였다. 여기에 금융 기업들의 비윤리적인 비즈니스 행태까지 결합하여 전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닥쳤다. 이제 대기업들은 모든 곳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사면초가가 되었고, 따라서 주주 가치 극대화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으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새로운 목표로 받아들인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4.2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다양한 정의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개념이나 지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각자가 서로 다른 뜻으로 이 단어를 쓰다 보니 상대방이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의도를 짐작해야 하는 상황으로, 불필요한 오해와 상호 비판이 쏟아지면서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할 지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정의들을 소개하고 간단히 비교한다. 다만 Business Roundtable2019년 선언은 워낙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니 이를 따로 언급한다.

 

 

(1)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다양한 정의

먼저 Investopia의 정의에 따르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란 기업이 모든 이해관계자들(소비자, 노동자, 납품 기업, 주주 및 지역사회)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시스템 하에서 기업의 목적은 장기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며, 또한 이해관계자들을 희생을 바탕으로 이윤(주주가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단지 주주만이 아니라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충족시키는 것이 모든 기업의 장기적 성공과 건강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단지 윤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합리적인 비즈니스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이해관계자에 대한 기업의 관여·지원(engagement)을 증대시키려는 목적으로 2008년 설립된 조직인 Enterprise Engagement Alliance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사회 전체(소비자, 노동자, 납품 기업, 지역사회와 환경)를 위해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주주 이익을 창출하려고 노력한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보다 다른 이해관계자를 우선시하거나, 한 이해관계자와 다른 관계자가 대립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합치(align)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20201월에 세계경제포럼(WEF)은 다음과 같은 다보스 선언(Davos Manifesto)을 발표하였다. “기업의 목적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공유 및 지속가치 창출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어서, 기업은 주주만이 아니라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모든 이해관계자의 다양한 이익을 이해하고 조정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강화하는 정책과 결정을 함께 힘을 합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 말이 그 말인 것처럼 보이지만, Enterprise Engagement AllianceWEF는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Investopia의 정의는 차이가 난다. Investopia는 모든 이해관계자의 니즈를 똑같이 해결하거나 균형을 맞추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비해, Enterprise Engagement Alliance는 모든 이해관계자의 니즈를 챙김으로써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초점이 있다. 단어 몇 개 차이이긴 하지만, 하나는 이해관계자의 개별적 이익에, 다른 하나는 공동의 이익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2) 2019Business Roundtable 선언

많은 이들은 20198월에 있었던 Business Roundtable(BR)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출범을 알리는 계기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 주요 대기업 CEO들의 모임인 Business Roundtable181명의 CEO가 서명한 Statement on the Purpose of a Corporation을 발표하였다. BR은 주기적으로 기업 지배구조의 원칙을 발표해왔는데, 과거에는 일관되게 예컨대 1997- 주주 우선주의(shareholder primacy), 즉 기업은 주주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원칙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선언은 기업이 주주뿐 아니라 소비자, 노동자, 납품 기업, 지역 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을 담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CEO들은 다음과 같이 다짐하고 있다.

 

“While each of our individual companies serves its own corporate purpose, we share a fundamental commitment to all of our stakeholders.

We commit to:

     - Deilvering value to our customers

     - Investing in our employees

     - Dealing fairly and ethically with our suppliers

     - Supporting the communities in which we work

     - Generating long-term value for shareholders.“

 

BR 선언이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고 보는 시각도 이해할 법 하다. 그러나 맨 마지막에는 주주들을 위해 장기적 가치 창출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문장은 주주들이 자본을 제공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도 하고, 성장도 하며 혁신도 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We believe the free-market system is the best means of generating good jobs, a strong and sustainable economy, innovation, a healthy environment and economic opportunity for all.“) 주주들이 자신들의 가치 창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 기업에서 돈을 뺄 것이고, 그러면 고객, 직원, 납품 기업, 공동체에 대한 가치 창출은 없었던 일이 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선언에 기업 지배구조의 변화에 대한 언급은 없다. , ”CEO의 임면권을 가진 주주총회-주주의 위임을 받아 경영진을 관리·감독하는 이사회-CEO“ 간의 관계는 지금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BR 선언의 내용은, 이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되었으니 CEO가 기업가치 극대화를 위해서 행동하면 안 된다거나, 이사회 등 주요 의사결정 기구에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에 프리드먼이 살아서 BR 선언을 들었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나는 그가 여기에 담긴 목표에 반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미국의 주요 기업 CEO들은 이해관계자 가치를 손상하면 기업의 장기적 생존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장기적으로 주주가치를 창출하는 범위 내에서 이해관계자 가치를 챙기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는 프리드먼의 메시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면 효율성이 달성되고, 따라서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제품을 구매한 이해관계자들 후생이 극대화되므로, 이것이 기업이 사회에 기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 프리드먼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럼 BR 선언은 냉소적으로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견해처럼 그냥 쇼인가? 그렇지는 않다. 첫째, 이처럼 명시적으로 대기업 CEO들이 단기적인 기업 가치에만 급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보다 나은 사회로 가기위한 명시적인 사회적 약속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둘째, CEO가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해도 자기가 해고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회사의 주요 주주들은 이러한 선언에 입장을 같이 할 것이다.“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주요 주주들과 CEO 간에 이미 컨센서스가 있는 것을 이렇게 멋지게 발표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본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훌륭한 CEO들을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들은 현재와 미래의 투자자/주주들에게 이제 사회가 이렇게 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에게도 좋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셋째, 둘째와 연계되어서, 더 많은 투자자들이 이제는 단기적인 이익에만 매달렸다가는 장기적으로 기업이 망할 수도 있고, 자신의 투자수익이 현저하게 나빠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ESG 투자로 대표되는 투자 패턴이 임계점을 넘기 시작해서 명시적으로 ESG로 대표되는 이해관계자 가치 추구를 해야만 자신의 이익이 보호되고,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자본주의가 살아남겠다고 인식한 것이다.

 

4.3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

 

(1) 두 가지 버전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앞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를 살펴보았는데,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버전은 기업의 이사회 및 CEO들이 (장기적인) 주주가치 극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잘 챙기자는 말이다. 이건 기업에 참여한 이해관계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기업들이 원래부터 추구하는 바이고, 사실 주주 자본주의를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실제로 특히 지난 20-30년 간 극단적인 주주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소홀히 된 사례가 빈발하였지만, 이것이 주주 자본주의의 이상적인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점은 대체로 공감할 것이다. 따라서 이 버전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크게 주장하는 것은, 자기반성을 하는 차원에서 의미는 있을지 모르나, 특별히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없기 때문에 실익도 없고 괜한 번잡함만 더한다.

두 번째 버전은 이해관계자의 이익 그 자체를 기업의 목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주장에 따르면 개별 이해관계자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으며, 이들을 배려하려면 주주 이익을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서 보았듯이, 어떤 방식으로건 이해관계자 이익이 기업 목표에 반영되고, 이렇게 되었을 때 주주의 몫이 그 전에 비해서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버전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이론이나 실행에 있어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2) 이론 및 실행 상의 문제점

가장 첫 번째로 대두하는 문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어떻게 만족시킬까 문제다. 여러 이해관계자 중 누구 이익에 우선순위를 부여할 것인지, 더욱이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이 충돌되는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문제는 기업 결정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예를 들어, GM2020년에 미시간의 내연 자동차 공장을 닫고 미국 남부에 전기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겠다고 제안했을 때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 경우에 GM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미시간 공장을 닫으면 그 공장의 근로자와 인근 지역에 해가 되지만, 공장을 닫지 않기로 하면 환경에 해를 끼치고 또 남부에 생길 수 있었던 일자리가 없어진다. 이 경우에 주주 가치 극대화를 하는 경우에는 어떤 결정이 이윤 극대화에 도움이 되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그렇지만 이처럼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도대체 그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다. CEO나는 공장과 일자리를 지켰고, 그들은 만족한다. 내 결정은 옳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완전히 반대의 결정을 내리고도, “나는 환경을 지켰고 새로운 지역 사회를 행복하게 했다. 내 결정은 대성공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확실한 의사결정 기준이나 조직의 목표가 없으면 case-by-case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고, 이렇게 되면 의사결정 건수가 늘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누가 언제 의사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자의적이고 일관성 없는 결정이 이어지게 된다.

둘째, 첫 번째 이슈와 연관되어서, 다양한 이해관계자 이익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경영자의 성과를 어떻게 측정, 평가할 것인가? 이윤 극대화 상황에 비해서 경영자가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창출하고 있는지 측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면 주주나 이사회가 경영자를 제대로 감시하기 어려워져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CEO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고, 바로 이것이 프리드먼이 경계했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모니터링 이슈가 존재한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렵지만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을 계속 찾아나가고 이사회와 CEO가 사회적 가치 추구를 하도록 인센티브 제도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SG 투자 및 경영 관점에서도, 어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 결정하고, 창출된 사회적 가치를 측정하며 이를 CEO 평가와 연계시키는 문제는 중요하다. 따라서 현실적인 난점이 있다고 해서 이해관계자 이익 또는 사회적 가치 추구를 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상론이나 목표 의식이 너무 앞서서 실행 과제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 시작 안 하느니 못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 두 문제가 주로 실행 상의 난점이라면, 앞으로의 두 가지 이슈는 이론 또는 이념적인 문제들이다. 이 중에서 먼저 상대적으로 덜 무거운 누가 기업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을 세 번째 이슈로 다뤄본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종종 프리드먼의 글에서 주주를 기업의 주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표현이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경영자는 고용주의 이익(=이윤 극대화)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주장도 틀렸다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 기업이론에서는 분산된 주식을 소유한 주주들을 기업의 소유주라고 보지는 않으며, 다만 계약의 집합체인 기업에서 잔여재산청구권자로 본다. 프리드먼이 1970년에 글을 썼을 당시에 이 개념에 익숙하지 않았을 수 있고 또 일반인을 위한 글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소유주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리드먼의 글은 기업을 계약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고, 잔여재산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주주가 잔여재산을 갖는다는 개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 주주가 기업의 소유주라는 프리드먼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나, 그렇기 때문에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도 오류이다. 왜냐하면 주주는 여전히 잔여재산(residual), 즉 이윤을 청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사와 CEO를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CEO가 이윤 극대화를 위해 행동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 없다. 기업에서 잔여재산청구권자 지위 문제는 네 번째 이슈로 연결된다.

넷째,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다른 모든 참여자들에게는 고정 금액을 지불하고 주주만이 잔여재산청구권을 갖는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회사에 자신의 인적자본을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노동자들은 회사 성과에 따라 인적자본 가치가 변화한다. 이처럼 기업 결정이나 성과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변동되는 이해관계자들에게 고정급여만 지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주주가치 극대화가 아니라 회사의 모든 이해관계자 가치를 극대화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기업 경영이 이루어지는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프리드먼 이론을 검토할 때 이미 다른 참여자들의 보상이 기업 성과와 연동될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고정 금액이 아니라 기업 성과에 연동되어 보상을 받는 것이 타당한 이해관계자는 주주 말고도 더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러나 보상액(이윤)이 전적으로 사후적인 기업 성과에 달려있고, 파산에 이르면 투자금도 모두 잃게 된다는 점에서 주주들과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잔여재산청구권은 정도 차이가 매우 크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성과에 연동하여 보상하고, 보상액 산정 방식에 대한 의사결정에 참여시킬 필요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노동자에 대한 보상 방식인데, 이들은 대체로 사전에 약속된 성과급을 받을 수 있고, 또 임금 협상이라는 의사결정 과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잔여재산 전체를 분배하는 과정에 참여한다거나, 또는 기업의 전반적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직원도 소수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조차도 주식 옵션은 주지만 기업 결정에 참여하는 투표권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 주주 이외의 참여자들에 대한 잔여재산 분배에 대해서는 별도의 협의 과정을 거치고,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투표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잔여재산 전체의 처분에 대해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넘어가면, 이는 주식회사라는 형태의 계약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문제가 된다. 예컨대 특정 이해관계자가 일회적으로 예상치 못한 손실을 보았거나, 큰 기여를 한 상황이라면, 주주가 자신의 몫이 줄어드는 계약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주주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주는 지속적이고 가장 강력한 잔여재산청구권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이익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계약을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주주는 결국 그런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 기업은 깨지는 것이다. 주식회사가 압도적으로 일반적인 기업 형태라는 사실은, 잔여재산청구권, 또는 의사 결정권을 주주가 독점한 계약이 불완전하더라도 현실적인 제약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계약 시스템이라는 뜻이다.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면, 다른 이해관계자를 희생시켜서라도 주주가 이윤을 가져가는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 카카오, 네이버 등 IT 기업이나 SK하이닉스 사례를 보면, 사회 문제 해결 과정, 기업의 의사결정 패턴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기업 성과 배분 과정에 대한 개선은 기업 지배구조와는 별개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기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바로 떠날 힘과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큰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

 

4.4 마무리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강도가 어느 정도건, 기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개선하자는 건 공통적이다. 단기 실적주의 및 이와 연동된 지나친 CEO 보상체계가 주주 이익만을 챙기는 방향으로 흘렀다는 점도 누구나 공감한다. 기업이 장기 이윤을 중시하고, 잔여재산 처분 방식을 바꿈으로써 다른 이해관계자와 기업 성과를 공유하자는 방향도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다만 이해관계자들이 이사회나 주주총회 등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주식회사 형태의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일이다.

ESG 투자와 ESG 경영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방향과 합치한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ESG 경영은 기업 목표는 여전히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랬을 때 이해관계자 이익은 두 가지 방식으로 챙길 수 있다. 하나는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관계자들에게 잔여재산 처분에 관해 일정한 권리를 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사회 및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주주들이 이사회를 통해 경영자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의사결정 방식, CEO 평가 및 보상체계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문제다. Hart & Zingales주주총회/이사회에서의 투표를 통해서 주주들이 선호하는 사회적 가치들을 골라내고 이를 기업을 통해서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독과점 기업에서는 프리드먼의 전제가 깨진 상황이니, 주주 후생 극대화로는 부족하고 사회 후생 극대화를 추구하도록 이사회에 의무화를 부과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ESG 투자가 정당화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그것이 장기적 투자 수익률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ESG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익률(이윤)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주주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투자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기업은 투표를 통해 주주가치 극대화가 아니라 주주후생 극대화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 투자자들은 자신의 선호를 특정할 수 있고, 목적성이 뚜렷한 펀드 - 예컨대 그린 펀드” - 또한 자산운용자가 투표를 통해서 투자자의 선호를 반영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펀드, 특히 연금 펀드 경우에 펀드 매니저들이 원래 투자자들의 선호를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까? 특히 수익률이 조금 줄더라도 특정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결정에 펀드 매니저들은 찬성을 해야 할까, 반대를 해야 할까? 투자자들의 선호를 파악할 방법이 없다면, 주주가치 극대화 이외의 결정에 찬성하는 것은 수탁자 의무를 위반하는 결과다. 논리적으로 주주후생 극대화는 ESG 투자·경영과 잘 합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실제로 주주후생 극대화를 구현할 의사결정 구조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Fama는 주주 후생 극대화라는 개념을 실행하기 어려우니, 차선책으로 주주 가치 극대화를 선택해도 ESG 경영이 가능하리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기업들이 사회적 가치와 이해관계자 이익을 어떻게 의사결정에 반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인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ESG 경영은 이제 막 몇 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5. 에필로그

 

지난 수십 년 간 전체 인류의 생활 여건은 계속 나아졌다. 1981년에는 전 세계 인구의 42%가 극한적인 빈곤 상태를 헤어 나오지 못했는데, 최근에는 그 비율이 10%로 줄었다. 미국의 절대 빈곤 비율도 198013%에서 최근에 3%로 줄어들었다. 이 숫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이루어낸 긍정적인 경제성과들을 보여준다. 이런 성과가 가능했던 것은 대체로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함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이미 많이 언급했지만, 아직도 그 리스트가 충분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존 경제체제의 이런 문제와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나 ESG 투자 등의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ESG 투자와 지향성이 거의 동일하다고 본다. 다만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옹호론 중에서 현재의 경제 체제는 회복 불능이고, 따라서 기업의 목적, 기업지배구조, 시장과 정부의 역할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견해도 일부 있는데, 이런 주장은 ESG의 지향성과 다르다고 판단한다. 종종 그들은 현재의 경제체제에 대해 얘기할 때는 문제점이 많은 현실을 이야기하고, 이를 이상적인 상황의 경제체제와 비교한다.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어떤 제도나 체제도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간직한 제도/체제와 비교하여 이길 수는 없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