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4년 11월 28일

 

"콘텐츠가 왕이다." 1996년 빌 게이츠가 한 말이다. 고객 기반을 넓혀야 하는 플랫폼에는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이 지상 과제였고, 콘텐츠를 달라고 줄을 서는 플랫폼 중에서 누구에게 먼저, 얼마에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콘텐츠 기업이 왕으로 보일 만도 했다. 디지털화·스마트화에 따라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면서 프리미엄 콘텐츠의 인기는 더욱 올라갔다.

그러나 그 후 상황은 조금씩 바뀌었다. 플랫폼 시장은 몇몇 글로벌 강자 중심으로 재편되는 조짐이 뚜렷하다. 그러다 보니 고객과의 접점을 보유하지 않은 콘텐츠 기업들이 약자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플랫폼은 과점적이고 콘텐츠는 좀 더 경쟁적이라는 시장 구조의 본질적인 차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콘텐츠는 플랫폼의 '을(乙)' 신세로 되어가고 있다.
최근 플랫폼들이 콘텐츠를 경쟁력 제고 수단으로 쓰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콘텐츠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예컨대 아마존은 지난 7월 매달 9.99달러에 70만권 이상의 전자책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킨들 언리미티드' 서비스를 선보였다. 음악 서비스는 다운로드(내려받기) 시장에서 라디오와 유사한 스트리밍(실시간감상) 서비스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판도라·스포티파이·멜론 등 음악 전문 플랫폼뿐 아니라, 애플·구글·아마존도 가세하여 광고 기반의 무료 서비스 또는 월 4000~5000원 정도에 무제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무제한 상품이 일반화되면서 콘텐츠의 몫은 더욱 줄어들고 있는데도, 애플이 최근 스트리밍 음원 단가 인하를 요구하는 등 압박이 강해지고 있다.

 

기기 제조 업체와 이동통신사들도 콘텐츠 경쟁에 뛰어들었다. 삼성전자는 지난 9월 미국에 이어 국내에서도 '밀크뮤직' 서비스를 시작해 무료로 360만곡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국내 서비스는 광고가 없고 유료 서비스도 없다는 점에서 미국과는 다르다.
삼성은 제조업과 플랫폼을 수직 결합한 애플·아마존과 경쟁하기 위해서, 그리고 구글 플랫폼에 대한 종속을 줄이기 위해서 콘텐츠 서비스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콘텐츠 사업이 목적이 아니라 디바이스 경쟁력 강화를 위해 콘텐츠를 묶은(bundling) 것이다. 기업들이 마케팅 활동에서 이런 부가서비스나 로열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제품 판매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학에서도 이런 종류의 비(非)가격 경쟁은 본질적인 제품 차별화 요소로 보지 않는다.
삼성이 어떤 전략을 쓰느냐는 건 기업의 몫이다. 하지만 ICT(정보통신기술) 산업 생태계 관점에서 이러한 전략이 콘텐츠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음악 시장은 이제 조금씩 유료 구매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무료 유통이 증가하면 산업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삼성은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있지만, 무료 유통이 일반화되면 콘텐츠 대가를 줄이려는 압력이 가시화될 것이다.

국내 음악 시장 규모는 작지만 한류(韓流)의 중요한 축이다. 한류가 확산하면서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좋아지면 궁극적으로 삼성을 포함한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커진다. 저수지의 물을 빼서 바다에 붓는다고 바다의 수위는 올라가지 않는데, 자칫 저수지가 말라서 물고기들이 살 곳이 없어질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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