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축약하고 수정한 컬럼이 조선일보(2012. 5. 19)에 게재되었습니다.

 

1. 노키아의 위기에 대해 상투적으로 내놓는 언론 또는 전문가의 진단이 있다. 조금씩 그 버전은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노키아가 피처폰(일반 휴대폰)에 집중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스마트폰 트렌드를 무시했고, 뒤늦게 애플의 아이폰을 따라갈 때에는 독자적 OS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노키아가 스마트폰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키아가 저가 피처폰 시장이 지속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아예 스마트폰에 대응을 하지 않았다거나, 노키아가 뒤늦게 스마트폰 시장에 진입했다든가 하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2. 뒤에서 보듯이 노키아는 궁극적으로 스마트폰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본격적인 스마트폰을 출시하였고, 판매 대수나 시장점유율 또한 압도적이었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도 제법 빠르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걸 맞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부족해서 소비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끌지는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스마트폰 시대가 곧 온다고 하면서 10년이 지났고, 이 10년간 노키아는 계속 시장을 이끌어갔다.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이렇게 되면 시장을 끌고 가는 First Mover는 지치고 관심이 줄어들어 추진 동력을 잃을 수 있다. 더 나쁜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관성적으로 대응하는 경우이다. 물론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제품 개선도 해 나가지만, 큰 틀에서 본다면 자신의 framework을 유지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그러나 내부에 있는 사람은 그런 미묘한 상황 변화를 감지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늙어 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듯이. 그저 내가 다 전에 겪어 본 일이다. 새로운 시도? 그것도 내가 다 해 본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스마트폰 시대가 바짝 내 앞에 와 있다. 원래 스마트폰은 내가 제일 잘 했는데...

 

3. 스마트폰의 역사는 IBM이 1992년 개발한 Simon에서 시작한다고 위키피디아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스마트폰이 나온 것은 노키아가 1996년 Nokia 9000를 출시한 이후에 9000 Communicator Series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계속 내놓기 시작하면서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건 오늘날의 스마트폰과는 다른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4년에 출시된 Nokia 9500 Communicator를 보면, 기술적인 성능 면에서는 현재의 스마트폰과 큰 차이가 없다. 심비안 OS를 채택했고, ARM을 기반으로 한 Texas Instrument의 프로세서를 사용했다. (현재 쓰이는 거의 모든 AP는 모바일에 적합한 ARM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3G 통신망, 64MB RAM, 컬러 디스플레이를 사용했다. 기능 또한 이메일, 인터넷, PDA 기능 등을 탑재하여서, 현재와 비교할 때 앱스토어를 제외한 나머지 기능은 거의 다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스마트폰과 성능의 차이는 있지만, 현재 제공되는 대부분의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별 문제가 없다. 적어도 스마트폰 자체의 기술적인 제약 때문에 오늘날만큼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판매량은 어떤가? 노키아는 ’04년 1,200만대, ‘05년 2,850만대, ’06년 3,900만대의 스마트폰을 판매하였다. 전 세계 시장은 ‘05년 4,630만대 ’06년 8,000만대로 이 중에서 노키아가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폰이 ‘07년 6월에 출시된 이래 ’08년 1,162만대, ‘09년 2,073만대, ’10년 3,998만대를 판매한 것과 비교하면 노키아의 ‘04년-’06년의 판매실적은 놀라운 것이다.

 

4. 문제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뭘 하느냐였다.

삼성전자도 2003년에 MITS M400이라는 스마트폰을 출시하였다. M400은 이메일, 인터넷은 물론, PDA, MS Office, 내비게이션 기능 등이 탑재되어 있으며, 카메라, 캠코더, MP3 플레이어, TV로까지 이용할 수 있는 복합 디지털 기기였다. 나도 2003년 출시된 직후 이 기계를 신기해하면서 만져 보았다. 딱 30분간.

당시 스마트폰의 문제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우선 모바일용 웹사이트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 웹사이트를 보아야 했는데 이것이 너무 힘들었다. 지금처럼 편리한 화면 확대 기능이 없기 때문이었다. 몇몇 전용 애플리케이션이 탑재되어 있지만, 조금 “갖고 놀다” 보면 곧 싫증이 날 형편이었다. 지금처럼 WiFi가 보급되지 못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WiFi는 데이터 트래픽의 과다 사용으로 인한 요금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동영상처럼 빠른 데이터에 access할 때는 WiFi가 훨씬 편하다. 그런데 2006년이 되어서야 노키아의 스마트폰에 WiFi 기능이 탑재되기 시작하였다. WiFi가 스마트폰의 필수적인 기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제약은 심각한 것이다.

이에 비해 RIM의 블랙베리는 QWERTY 자판을 탑재하고 편리한 이메일 시스템을 갖추어 업무용 스마트폰 영역에서 확실한 입지를 가졌다. ‘06년에 RIM은 600만여대의 블랙베리를 판매하였다. RIM이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는 좋은 위치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나, 노키아가 지향하고 결국 애플이 만들어낸 범용적인 스마트폰 시장과는 차이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만큼 시장도 제한되어 있었다. 일반 소비자용 스마트폰이 이메일 기능을 원활하게 제공하기 시작하자 블랙베리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블랙베리가 기능이나 타겟 시장 면에서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5. 애플이 아이폰을 판매하면서 앱스토어라는 새로운 킬러 애플리케이션을 함께 제공했다는 점은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첫 아이폰이 출시된 이후 1년 정도 지난 다음이긴 하지만.) 애플은 아이팟을 출시하면서 아이튠스를 함께 제공한 경험을 잘 활용하였고, 생태계를 구축함으로써 스마트폰을 활성화시킨 “공”을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그 공으로 지금 40%에 가까운 영업이익률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터치스크린 등 획기적이고 직관적인 UI, 그리고 환상적인 디자인은 스마트폰의 관심을 올린 또 다른 공신들이다.

그러나 애플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노키아보다는 우호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언급한 WiFi 기능이다.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했을 때는 WiFi 기능이 default화되면서 비용이나 편리성 면에서 획기적으로 스마트폰의 활용 가치가 올라갔다. 그리고 아이폰 이전에 꾸준히 모바일 인터넷 환경이 조성되면서 아이폰이 출시될 쯤에는 모바일용 웹사이트가 급격히 일반화되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모바일 환경에 적합한 SNS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점도 반드시 언급할만하다. 지금 각자가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이들 SNS에 접속하는 것이 스마트폰 이용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면, 하나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 기술적으로는 만족할만한 성능을 가졌으면서도 킬러 애플리케이션, 비즈모델 등 생태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IT 분야에서 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ADSL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ADSL을 이용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는 하나로통신(現 SK브로드밴드)이 1999년 4월에 처음 개시하였다. 그런데 ADSL은 KT가 이미 ‘90년대 중반에 상용화를 위해 시범서비스를 제공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아직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KT는 VOD(Video On Demand)를 ADSL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으로 상정하여 이 서비스의 상용화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러나 제한된 콘텐츠에 흥미를 갖지 못한 가입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이 서비스는 상용화되지 못했다. 아마도 그 이후에 KT에서는 ADSL 기술을 이용하여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류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Been There, Done That." 증후군이다. 하나로통신이 ADSL을 출시하였을 때에도 전문가들은 이 서비스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과거에 “KT조차도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로통신의 ADSL은 인터넷이라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을 만나서 폭발적으로 가입자를 늘려나갔다. KT는 뒤늦게 뛰어들어 처음에는 고전하였다. 그러나 서비스 사업은 제조업과 다르게 가입자 기반을 가지고 있다. KT는 강력한 시내전화 가입자를 기반으로 하나로통신을 추월할 수 있었다.

 

7. 노키아는 생태계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스마트폰을 시작하여 고전한 반면에, 애플은 스스로가 생태계를 만들어서 스마트폰 전성기를 열어 나갔다. 애플이 위대한 기업으로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대한 기업 열전”을 쓰려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에게는 생태계를 스스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노키아의 스마트폰 사례에서, 주변 환경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적인 가능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얻을 수 있다. 무조건 빨리 나가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너무 앞서 가면 얻는 것 없이 지칠 수 있다. 심지어는 뒤에 따라오는 경쟁자에게 길을 열어주기만 할 수도 있다. 조직 내부에는 체념과 패배의식, 그리고 냉소주의가 흐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경쟁자보다 반발자국만 앞서 가면 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발자의 이익(First Mover's Advantage)이 아니라 선발자의 불이익(First Mover's Disadvantage) 또는 심하게 이야기하면 선발자의 저주(First Mover's Curse)가 될 수 있다.

 

한편, 애플에 앞서 스마트폰을 성공시키려고 노력했던 노키아와 삼성 모두 "선발자의 불이익"을 당한 측면이 있는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노키아는 이를 극복하는데 실패한 반면에, 삼성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 보기로 한다.

Posted by 조 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