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하여 조선일보(2012. 4. 27) 컬럼에 기고하였습니다.
1. Prologue
스마트폰의 등장을 계기로 우리 주변에 있는 IT, 가전기기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휴대폰, PC, TV를 넘어 냉장고 등 가전기기까지, 더 나아가 자동차까지 그 기능을 완전히 바꿀 기세이다. 이들 기기들은 점점 기능이 늘어나면서 서로를 닮아가는 양상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이들 기기들을 별도의 시장으로 분류하기 보다는 ‘스마트 정보단말기기(smart device)’ 시장으로 묶어서 재정의(re-define)하는 것이 이 산업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이제 이 산업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하고, 그것이 기업전략과 산업정책에 갖는 시사점을 살펴보도록 한다.
2. 수직적 통합화(Vertical Integration)
과거에 제조업체들은 부품을 사오거나 직접 만든 후에 이를 잘 묶어 하나의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면 되었다. PC에 들어가는 운영체제(OS)는 사실상 모두 MS 제품이었기 때문에 무슨 OS를 탑재해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과거 휴대폰(피처폰, feature phone)에는 OS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단지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플랫폼(미들웨어)을 통신사업자가 지정해주면, 이를 탑재해서 CPU, 모뎀 등 하드웨어와 잘 연동되도록 해 주면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플랫폼은 WIPI(Wireless Internet Platform for Interoperability)를 쓰도록 의무화되었다가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풀렸다.) 콘텐츠 또한 제조업체가 신경 쓸 영역이 아니었다. 휴대폰은 통신사업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서비스 플랫폼 - 예컨대 SK텔레콤의 네이트 - 에서 어떤 콘텐츠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PC에서는 인터넷을 통해서, TV에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서 모든 콘텐츠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 경쟁구도는 하드웨어 완제품간의 경쟁에서 하드웨어·운영체제(OS)·콘텐츠를 아우르는 전체 가치사슬(Value Chain) 연합군간의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축에는 OS가 있다. 모든 디바이스가 ‘스마트’화되면서 과거에는 PC에만 탑재되던 OS가 스마트폰, TV는 말할 것도 없고, MP3 플레이어, 전자책, 게임기 등에도 탑재되고 있다. 이들 기기에 쓰이는 OS는 특정한 기기에 맞추어져서 특정한 기능만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범용 OS(General Purpose OS)라고 부른다. 따라서 OS가 탑재된다는 것은 곧 다양한 콘텐츠와 서비스가 함께 따라간다는 걸 의미한다. 애플, RIM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제공하는 수직결합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제조업체들은 구글(안드로이드), MS(윈도우폰) 등과 제휴하여 대응하고 있다.
이런 경쟁구도 하에서는 설사 뛰어난 성능을 가진 단말기기를 제조한다고 해도 단말기기에서 이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신통치 않으면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RIM이나 노키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는 것도, 초기의 안드로이드 OS가 고전했던 것도 애플리케이션 스토어의 콘텐츠 미확보에 기인한다. 그에 비해 애플은 누구보다도 먼저 단말기와 콘텐츠를 묶은 번들 상품을 판매하여 성공적인 비즈 모델을 구축하였다. 안드로이드 마켓이 애플리케이션의 숫자 면에서는 이제 애플의 앱스토어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다운로드되는 유료 앱은 미미한 수준이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안드로이드 마켓의 앱 매출액은 애플 앱스토어의 24% 수준에 불과하다. (Business Insider, “The Future of Mobile" 2012. 3. 21) 지금까지의 누적 자료를 보면 그 차이는 더 커진다. <표>에서 보듯이 각각의 애플리케이션 스토어 오픈 이후 작년 하반기까지의 누적 앱 매출액을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안드로이드 마켓의 매출은 애플의 7% 수준이고, 전체 앱 다운로드 건수에서 유료 앱 다운로드가 차지하는 비율 또한 1.3%로 애플의 13.5%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 따라서 개발자들은 돈이 될 만한 좋은 애플리케이션은 주로 애플 스토어에 올리는 편이다. 이러다 보니 스마트폰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아이폰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이 같은 수직적 통합 추세는 앞으로 전개될 스마트TV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날 것이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애플과 구글이 다양한 형태로 스마트 TV 시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삼성이나 LG가 내 놓는 스마트TV도 OS와 애플리케이션 스토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TV와는 완전히 다르다.
<표> 안드로이드 마켓과 애플 앱스토어 매출액 비교
구 분 |
기준 시점 |
앱 다운로드 수 (백만 개) |
총 매출 (백만달러) |
유료 앱 비율 |
안드로이드 마켓 |
2011-11-17 |
6,750 |
341.7 |
1.3% |
애플 앱스토어 |
2011-09-30 |
18,566 |
4,939.6 |
13.5% |
자료: Piper Jaffray
우리나라 기기 제조업체들의 경쟁력은 주로 하드웨어 제조능력에 있다. 그런데 이처럼 Value Chain 전반에 걸친 연합군간 경쟁으로 바뀌면서, 하드웨어의 중요성은 줄어드는 반면에 우리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OS와 콘텐츠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럼 이 같은 합종연횡의 전쟁터에서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의 제휴전략은 어떠한가? 우리 기업들은 우수한 하드웨어를 바탕으로 다양한 OS 업체들과 제휴하는 Multi-OS 전략을 펼치고 있다. 예컨대 우리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은 안드로이드와 윈도우폰 모두를 제조하고 있다. 한편 삼성전자는 자체 OS인 바다의 시장점유율을 조금씩이나마 늘려가고 있다. (‘10 3Q 1.1%→'11 3Q 2.2%) 또한 인텔과 함께 웹 기반의 개방형 OS인 타이젠(Tizen)을 개발하고 있는데, ’12년 2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Mobile World Congress)에서 타이젠의 베타버전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를 위한 개발 툴(SDK, Software Development Kit)을 공개하는 등 당초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화웨이가 타이젠에 참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삼성 이외에는 주로 통신사업자들로 구성된 연합체에 합류한 최초의 메이저 스마트폰 제조업체가 되었다. 삼성은 궁극적으로 타이젠과 바다를 통합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스마트 TV에서는 애플이나 구글이 주춤하는 사이에 삼성, LG가 자체 OS를 탑재한 제품을 공격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앞으로 스마트 TV에서는 스마트폰, 태블릿 PC와 다른 경쟁구도를 보일지가 주목해서 볼 경쟁 포인트이다.
스마트 디바이스는 진화 단계로 볼 때 아직 초기라서 OS와 애플리케이션 스토어가 수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애플 제품에는 애플 앱스토어 이외의 콘텐츠는 아예 없다. 안드로이드는 개방 정책을 쓰고 있으나, 안드로이드 마켓, 통신사업자(T 스토어, 올레마켓)나 제조업체(삼성앱스, LG 스마트월드)의 애플리케이션 스토어만을 통해서만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직적으로 결합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HTML5 기반의 웹 플랫폼이 일반화되면서 웹을 통해서 콘텐츠와 서비스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개별 OS(Native OS)를 기반으로 한 앱 스토어는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경쟁요소로의 중요성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수직적 통합의 강도는 많이 줄어들고, 기기 제조업체 자체의 경쟁력이 더 중요해질 전망이다.
3. 수평적 확대(Horizontal Expansion)
수평적 확대는 기본적으로 융합화(convergence)의 산물인데, 다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의 기기에 여러 가지 기능이 통합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둘째는 지금까지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던 기기들이 동일한 OS·UI·콘텐츠·부품을 사용하면서 서로 연동되는 현상을 뜻한다.
하나의 기기에 여러 기능이 통합되는 현상도 OS의 탑재에서 출발한다. 즉, OS가 탑재된다는 것은 특정 기기와 특정 기능의 1:1 결합이 없어지거나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제 라디오와 TV는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어느 곳에서건 듣고 볼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와 TV라는 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제공하던 실시간 음성방송과 영상방송 기능이 중요한 것이고, 이들 기능을 이제는 모든 스마트 디바이스에서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이 월 40시간이라고 한다. (인터넷 진흥원, “2011년 상반기 스마트폰 이용 실태조사” 2011년 7월) 이에 비해 음성전화는 발신과 수신을 합해도 월 7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더 이상 음성전화용 단말기로 보아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등장으로 휴대폰과 노트북의 차이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 두 제품을 제품 라인업의 양 끝으로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할 MP3 플레이어, 전자책(e-book reader), 게임기, 디지털 카메라 등의 구분이 애매한 상황까지 되었다. (경제학적으로 표현하면 Hotelling 모델에서 [0, 1] 사이의 제품 공간에서 적절하게 분산되어 존재하던 제품이 모두 중간으로 모여드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개별 상품으로 존재했던 MP3 플레이어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아이팟은 2008년 5,483만대를 정점으로 2011년에는 4,262만대로 줄었다. 어쩌면 “아직도 아이팟이 그렇게 많이 팔리나?” 하고 놀랄 사람이 더 많을 듯싶기도 하다.) 전자책인 킨들과 태블릿 PC도 거의 유사한 기능을 갖게 되어 둘 사이의 구분도 무의미해지는 듯하다.
물론 서로 기능이 유사해진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하나의 기기로 통합된다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태블릿, PC, 스마트 TV 등은 분명히 별도의 제품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처럼 이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 없이 독립적으로(isolated)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들 기기들은 동일한 OS·UI·콘텐츠 장터를 공유하면서 매끄럽게 연동되어 통합된 사용자 경험(UX, User Experience)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기들을 사용하면서도 동일한 콘텐츠를 동일한 환경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N-스크린 서비스라고 한다. 모든 기기들이 통신망으로 연결되고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해 콘텐츠나 서비스를 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N-스크린 서비스는 활성화될 전망이다.
애플은 스마트 디바이스의 수평적 확대를 선도하면서 그 중요성을 잘 보여주었다. 2001년 스티브 잡스가 디지털 허브 전략을 발표할 때만 해도 애플은 PC 이외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맥이 모든 디지털 기기를 아우르는 디지털 허브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차례로 내 놓음으로써 아이맥이 허브 역할을 하면서 서로를 연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OS·UI·콘텐츠 장터를 운영하여 통일성을 확보한 것이 기기간의 매끄러운 연동에 큰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아이클라우드가 수평적 확대를 촉진하는 핵심요소로 추가되었고, 아이TV의 출시가 준비되고 있다.
수평적 확대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한번 개발된 OS는 여러 기기에 탑재될 것이니 개발비용을 공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스마트 기기들은 동일한 부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부품 구매에서도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개발자 입장에서도 한 번 개발한 앱이 다양한 기기에서 사용될 수 있으므로 비용 효율성 및 시장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의 수평적 확대는 시장구조 측면에서 두 가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첫째, 단일 카테고리의 제품만을 출시하는 업체들의 입지는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즉, 동일 카테고리 내 제품들 간의 일관된 UX뿐 아니라, 타 카테고리 기기들과의 통일된 UX와 조작 방법 등이 중요해지면서 보다 많은 카테고리의 기기를 생산하는 업체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휴대폰, PC, TV, 가전기기 등 모든 스마트 디바이스 영역에서 강력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입지가 더욱 견고해질 가능성도 크다. 세계 어느 제조업체도 다양한 제품라인의 범위와 경쟁력 측면에서 우리 기업들을 따라오지 못한다.
둘째, 이들 다양한 기기들에게 N-스크린 환경을 제공해주기 위해서는 동일한 OS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과거에도 기기간의 연동 시도는 꾸준히 있었지만 소비자들에게 대세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대개의 소비자들은 조금만 복잡한 조작이 필요한 경우에는 연동을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 기업들이 애플에 불리하거나, 안드로이드·MS와 같은 OS 업체에 종속될 위험성이 있다.
4. 고기능화 또는 스마트화
스마트 디바이스의 출현은 곧 고기능화를 의미한다. 모든 기기는 영상 정보를 주고받는 디스플레이와 카메라, 음성 정보 입출력을 위한 스피커·이어폰 및 마이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위치 정보, 속도 정보, 각도 등의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센서가 탑재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를 저장·처리·전송하기 위한 메모리 및 비메모리 반도체도 필수적인 요소다.
먼저 휴대폰과 TV에는 컴퓨팅 기능이 나날이 강화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에서 CPU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경우 두뇌에 해당하는 코어 수가 재작년까지만 해도 하나였는데, 작년 1월 출시된 스마트폰에 듀얼코어 프로세서가 탑재된 이래로 고급 스마트폰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 초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을 주도하는 퀄컴과 엔비디아가 올해 상반기 중에 쿼드코어를 탑재한 스마트폰이 출시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쿼드코어 프로세서를 사용하면 스마트폰의 성능이 거의 데스크톱 PC 수준까지 올라가는 셈이다. 모바일 기기에 탑재될 D램과 낸드플래시 용량도 3년 이내에 5-10배 정도 늘어날 전망이다. 일례로 재작년 스마트폰에 장착된 D램 용량은 300MB 정도였으나 작년에는 1GB로 늘었고, 올해 하반기에는 2G D램 탑재도 가시화될 전망이다. 스마트 TV에도 이미 스마트폰급 이상의 D램이 사용되고 있으며 머지않아 PC급의 D램이 사용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낸드 플래쉬 메모리 또한 태블릿 보다 더 큰 용량이 탑재되고 있다.
최신 통신기능의 탑재도 일반화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에 휴대폰이 선보인 이래, 1990년대 말에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PC에 유선통신 기능이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2010년에 태블릿 PC의 등장으로 최신 무선통신 기능이 PC에 탑재되기 시작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인터넷 기능이 있는 TV가 출시되었다. 이제 머지않아 자동차에는 무선통신이, 모든 가전기기에는 유선통신이 연결될 것이다.
고성능 디스플레이 경쟁도 치열하다. 스마트폰에서는 AMOLED나 아이폰에서 사용되는 “레티나(Retina)” 디스플레이와 같은 고선명 LCD 탑재가 일반화되었다. 최근에 출시된 뉴 아이패드에서는 아이패드2에 비해서 네 배나 선명한 LCD 디스플레이를 사용함으로써 2,048×1,536 해상도를 지원하고 있다. 아이패드보다 훨씬 큰 Full HD(High Definition)급 TV가 1,920×1,080 해상도인 점을 감안하면 이 디스플레이의 선명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스마트 디바이스의 고기능화가 진전됨에 따라 부품비용도 크게 증가하였다. 한 자료에 따르면 과거 피처폰(feature phone)에 들어가는 총 부품비용이 49-78달러 수준이었는데, 스마트폰에서는 124-179달러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아이폰4와 아이패드(16GB Wi-Fi 전용)의 부품비용이 각각 218달러, 266달러에 이른다. (이 부분은 블로그의 다른 글, “숨은 그림 찾기 - 아이폰 이윤, 애플이 58.5%, 한국기업이 4.7%를 챙겼다는데...”를 참고할 것) 지난 3월에 출시된 뉴 아이패드의 부품 비용은 더욱 크게 증가하였다. 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의 조사에 따르면 뉴 아이패드(4G 32GB 기준) 판매가격 729달러에서 부품비용이 364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도 고기능화가 진전됨에 따라 부품비용은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하이엔드 제품 제조업체들은 높은 이윤을 얻고 있지만, 점점 가격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이라 이러한 부품비용 증가는 스마트 기기 제조업체에게 큰 부담이다. 특히 현재의 스마트 TV처럼 새로운 기능이 아직 고객에게 충분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원가는 상승하였는데 비해 경쟁으로 말미암아 제품 가격은 그만큼 상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고기능화의 수혜기업은 시스템 반도체, 메모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체들이다. 모바일 반도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는 메모리, AMOLED 및 고성능 LCD 분야에서는 우리나라 부품업체들이 많은 과실을 얻고 있다. 예컨대 뉴 아이패드의 경우 삼성이 디스플레이, AP, 낸드 플래시, 배터리 등을 납품하고 있어 전체 부품 비용의 약 50%가 삼성의 몫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CPU·GPU(Graphic Processing Unit) 등의 프로세서, 통신 칩 분야에서는 AP 분야 일부를 제외하고는 미국 업체들이 대부분의 매출을 가져가고 있다.
5. 하이엔드(High-End)와 로우엔드(Low-End) 제품의 병존
먼저 스마트폰의 경우를 보자. 애플 아이폰이나 삼성 갤럭시의 고급 모델은 700-800달러를 호가하는 반면에, 중국의 ZTE나 화웨이가 내놓는 보급형 스마트폰의 가격은 200달러를 크게 밑돈다. 최근에 삼성전자도 보급형 스마트폰 ‘갤럭시 포켓’을 신흥시장을 타겟으로 출시하였다. 이 제품은 안드로이드 OS를 사용하며 2.8인치 디스플레이, 800MHz 싱글코어 프로세서, 3GB 저장장치, 200만 화소 카메라를 사용하여 성능은 고급형에 비해 상당히 큰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가격을 100달러대로 낮추어 ZTE 등과 같은 가격대에서 직접 경쟁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TV도 스마트 기능을 탑재한 것은 아니지만, 국내 중소기업이나 중국 제조업체가 제작한 42인치 Full HD급의 LED TV를 삼성, LG의 동급 모델에 비해 반값 수준인 70만원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회성 기획 상품으로 출발하였으나 이제는 하나의 상시적인 제품군으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한편 최근에는 인터넷 쇼핑몰을 중심으로 20만 원 대의 태블릿 PC가 한정 상품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사양은 대체로 7-8인치 디스플레이, 200만 화소 카메라, 8-16GB 저장장치, Wi-Fi 접속 등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 물론 하이엔드 제품에 비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가격 대비 성능에 대한 만족은 매우 높은 편이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로우엔드 제품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수요 관점에서 본다면, 스마트 기기의 보급이 확산됨에 따라 제품 사양보다는 가격에 더 민감한 소비자들이 스마트 기기 구매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의 경우 작년까지의 누적 판매량이 약 10.7억대 정도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물론 이미 상당수의 교체수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보급률은 이보다 낮겠지만, Early Adopter들은 이미 고가의 스마트폰을 모두 구매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Early Adopter들의 구매가 끝난 후에 제품의 사양과 가격이 낮아지는 것은 모든 전자제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공급 관점에서 본다면, 하이엔드 제품과 로우엔드 제품의 가격 차이는 사양, 제조기술, OS 및 애플리케이션 스토어, UI, 디자인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지금은 OS와 앱 스토어가 핵심적인 경쟁력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OS 및 앱 스토어간의 품질 차이가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웹 플랫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중요성이 줄어들 것이다. 한편 다양한 기기를 쉽게 연동하여 사용할 수 있으려면 UI가 중요하다. 앞으로도 음성·동작·얼굴 인식 등 UI에서 새로운 혁신은 계속될 것이다. UI와 디자인이 제품 선호도에서 큰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은 애플 제품을 통해서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 디바이스 업체들이 디자인과 UI에 대해 훨씬 많은 준비를 하게 됨에 따라 차별화 포인트는 점차 축소될 전망이다.
그에 비해 제조기술의 중요성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제조업체들이 SW나 디자인의 확실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이엔드 제품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뛰어난 제조능력 덕분이다. 흔히들 애플이 아이폰의 SW와 디자인을 맡고 제조는 폭스콘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폭스콘은 제조기술 중에서 가장 범용화(commodity)된 조립기능만을 담당할 뿐이고, HW와 관련된 나머지 모든 기능은 애플이 수행하고 있다. 컴퓨팅 기능을 휴대폰에 구현하기 위해 독자적인 프로세서(AP) 개발, 새로운 서비스와의 연동, 통신기능의 최적화, 최고급 디스플레이를 탑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시행착오 극복과 기술개발은 모두 애플의 몫이었다.
앞으로도 당분간 컴퓨팅, 통신, 디스플레이 등 하드웨어 기능은 고도화될 것이고, 이러한 하드웨어 기능을 활용하는 새로운 서비스도 계속 등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태블릿 PC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작은 사이즈에 이 모든 기능을 넣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고기능과 저전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인가 등 수많은 숙제를 풀어야 한다. 이처럼 고기능화·소형화·저전력화 등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건 분명히 차별적인 경쟁력이다.
마지막으로 클라우드 컴퓨팅이 스마트 디바이스의 저사양화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클라우드 컴퓨팅이라는 것은 계산 기능(컴퓨팅 파워)과 저장 공간 등 컴퓨터의 역할을 단말기가 아닌 클라우드에서 상당 부분 대신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 단말 기기는 소위 Thin Client화하기 때문에 사양이 낮은 단말 기기의 비중이 증가할 것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하이엔드 제품의 높은 가격은 높은 사양, 뛰어난 하드웨어 제품 능력, 다양한 SW 역량 및 디자인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런데 모든 제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항상 범용화와 저마진화가 진행된다. 초기에는 어떤 요소가 차별적인 경쟁력으로 작용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발 경쟁자가 추격하여 더 이상 차이가 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엔드 제품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서 차별화 요소를 계속 만들어 냄으로써 후발 경쟁자를 뿌리치고, 그러한 차이를 브랜드 파워로 구축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가능한 것이다.
6. Epilogue - 전략적·정책적 시사점
이 글에서 나는 기존의 산업분류에서 벗어나 휴대폰, 노트북, PC, TV, 더 나아가 가전기기까지를 스마트 디바이스로 묶어서 하나의 산업이라는 framework에서 분석하였다. 이 같은 분석을 통해서 과거에는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녔던 이들 기기들이 C(콘텐츠)-P(플랫폼)-N(네트워크)-T(터미널, 단말기기)라는 가치사슬 관점에서 매우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마트 디바이스 산업에서 우리나라가 경쟁력을 유지·확대하려면 OS·콘텐츠 장터·UI 등 SW적인 요소들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어쩌면 평범한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OS의 영향력은 웹 플랫폼이 일반화됨에 따라 줄어들겠지만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제휴와 기술개발을 통해 OS 경쟁력 확보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애플·구글·MS가 OS를 레버리지하여 서비스 및 서비스 플랫폼 영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스마트 디바이스에서는 하드웨어와 서비스간의 연계성이 높아졌고, 제조업체들이 다양한 형태로 서비스화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제조업체가 서비스에 취약하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랬을 때 우리 제조업체들이 서비스 플랫폼, 클라우드 컴퓨팅, 킬러 서비스 등을 독자적으로 확보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제휴를 통해서 풀어나갈 것인지 등에 고민해야 한다. 포괄적으로는 제조업의 서비스화 전략이 디바이스 하나하나를 잘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HW적 요소의 중요성이 지나치게 낮게 평가되고 있으나, 이것은 우리 기업들이 계속 유지해야 할 강력한 차별화 요소이다.
정부 정책 관점에서 보면, OS와 UI의 경쟁력을 향상하기 위해서 정부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OS와 콘텐츠 장터는 시장에서 민간 주도로 갈 수 밖에 없고, UI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업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정부는 SW쪽에서 원천 기술개발과 인력 양성 같은 분야에서 꾸준히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시스템 반도체와 소재가 대표적인 중소·중견기업 아이템이면서도 기술집약적인 산업이고, 우리나라에 대기업이 강력한 수요업체로 존재하는 품목이기 때문에 정부가 기술개발을 지원하고 대기업, 중소기업간 연계, 산학연간 연계 등의 촉매 역할을 한다면 이들 산업에서 많은 강소기업들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장과 고용’을 함께 달성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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