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 2022년 3월 10일

 

운용자산이 10조 달러가 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래리 핑크는 올초 블랙록의 투자 기업 CEO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다. 편지 제목은 ‘자본주의의 힘(The Power of Capitalism)’. 그는 이 편지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투자자와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런 활동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만 가능하며 이미 체제에 녹아들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가 ESG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연례 서한을 보낸 것은 올해로 5년째다. 지난 4년간의 편지에서 ‘ESG의 당위성’을 줄곧 역설해온 것에 비하면 한 발 전진한 셈이다.

이처럼 ESG가 주목받는 것 만큼이나 회의적인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린다. “ESG, ESG하면서 뭔가 하는 것 같긴 한데, 곧 시들해지겠지” “기업이나 투자자들이 갑자기 환경·사회 문제를 챙기겠다고? 쇼하는 것 아니야?” “몇몇 착한 투자자, 기업들이 열심히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ESG의 진정성이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들이다.

 

ESG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신호들

 

ESG는 한 때의 유행일까, 지속가능한 미래일까. 필자는 ESG를 주제로 책도 내고, 강의도 하고 있지만 ESG가 대세라고,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본다. 다만 ESG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신호가 많다는 점은 말할 수 있다. 경제이론과 잘 합치하는데다, 투자자 및 자본시장 또한 ESG 친화적으로 변화하고 있어서다.

먼저 경제이론 측면에서 ESG를 평가해 보자. 흔히, “ESG에 주력하면 이해관계자들을 더 많이 배려해야 하고, 그러면 이윤 극대화에 반하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경제이론에서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한다고 했을 때, 이는 올해만의 이윤이 아니라 미래에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이윤까지 합한 금액을 뜻한다. 따라서 올해 적자가 나더라도 앞으로 큰 이윤을 내리라고 생각하면 그 기업의 기업가치는 높게 평가된다. 기업이 소비자를 속이고 근로자와 납품기업을 쥐어짜면 당장은 이윤이 늘지 몰라도, 그 기업이 장기적 이윤 극대화는커녕 살아남을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기 실적에 매몰돼 이런 평범한 진리를 망각한 것이 자본주의 위기를 불러왔는데, 경제이론은 기업들에게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치고 있다.

 

투자자 성향도 변하고 있다. 세계 3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 보유 지분을 합하면 이들은 미국 S&P 500 기업 88%의 대주주다. 이런 유니버설 오너(universal owner), 즉 수 조 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대형 투자자들은 ESG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다. 유니버설 오너들은 워낙 덩치가 커서 글로벌 경제 전체의 위험을 회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런 문제를 그대로 안고가야 하는 입장에선 필연적으로 인류의 문제가 곧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연금·보험 업계도 수십 년에 걸쳐 돈을 지급해야 하는 특징상 장기적 투자 수익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장기적 호흡이 필요한 ESG 투자에 우호적인 이유다. 최근 이런 장기 투자자 비중도 늘고있다. 전세계 공적연금 규모는 2014년 14조 4000억 달러에서 2019년에는 17조 달러로 증가했다. OECD 국가들의 사적연금 또한 2009년 26조 3000억 달러에서 2019년 49조 2000억 달러로 10년새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 국민연금도 운용자산이 2020년 833조원으로 10년새 2.6배 증가했다. 주식자산 비중 또한 같은 기간 16.7%에서 21.2%로 확대됐다.

개인 투자자들의 ESG 투자에 대한 수요 역시 확대되고 있다. 특히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고 공정성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자신의 자산이 ESG 활동을 잘 하는 기업에 투자되길 희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자본시장 환경도 좋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ESG 투자의 수익률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ESG 투자가 높은 투자수익을 올려야 하는 수탁자 의무(fiduciary duty)를 위반하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제 그런 우려는 해소된 셈이다. 이제는 ESG가 재무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산 운용자들이 도리어 이런 요인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을 정도다.

 

ESG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인들

 

반면 ESG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소들도 곳곳에 널려 있다. 유니버설 오너와 장기 투자자 비중이 증가하고 있긴 하지만, 자본 시장은 여전히 단기 실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투자자나 기업이 장기 실적을 중시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장치들, 예컨대 CEO 보상액을 단기 실적이 아닌 장기 실적과 연동하는 것 등도 아직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지금까진 ESG 투자 수익률이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투자 기업의 재무성과가 나빠지면 ESG 투자 수요가 급감할 위험성도 언제나 존재한다. 또 기업이 장기적 이윤과 ESG 성과를 동시에 이뤄내지 못할 위험성도 크다.

 

무엇보다 ESG에 가장 위험한 적은 ‘그린워싱(greenwashing)’이다. 기업이 이익을 목적으로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마치 ESG 친화적인 것처럼 홍보하는 ‘위장 환경주의’를 뜻한다. ESG가 큰 흐름으로 자리잡아가자 투자자나 기업들이 너도나도 그린워싱에 나서고 있다. 자산운용사들은 기존 펀드에 ESG 요소를 살짝 덧칠한 ESG 펀드를 출시하고 있다. 기업들도 기존 사회공헌 활동이나, 플라스틱 줄이기 같은 하찮은 활동들을 ESG 경영으로 포장해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ESG 펀드나 기업 내부 정보에 어두운 소비자들은 이들이 ESG 투자나 경영을 정말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지지를 보낼 텐데, 이런 일이 반복되는 한 ESG는 그저 말의 성찬으로 끝날 뿐이다.

 

ESG의 지속가능성이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ESG도 건강한 생태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는 ESG 투자자, ESG 경영자 그리고 제도 정비를 맡은 정부가 합심하여 노력할 때만 가능하다.

 

 

◇조신 교수는

기업과 정책, 학계를 모두 경험한 통섭적 학자다. 서울대학교와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강의했다. 이후 기업 현장에 뛰어들어 SK커뮤니케이션즈와 SK브로드밴드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대통령비서실 미래전략수석으로도 일했다. 저서로는 '넥스트 자본주의, ESG' 등이 있다. ‘ESG 바로읽기’에서는 현재 경제·경영계와 자본시장 전반을 지배하는 핵심 화두로 떠오른 ESG가 실제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고, 이에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지 독자의 눈높이로 전달한다.

Posted by 조 신 :